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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eam. Laputa의 클리셰 SF세계관의 크리쳐는 그어그어하고 울지 않는다.(w.청서)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며, 1편의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읽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 주세요!
체리님 커미션 원본 https://www.postype.com/@cherry-gold/post/12599385
쫓기는 것보단 쫓는 것이 익숙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이 좋았지. 메테오는 이제와 돌이켜보면 감히 팔자좋다고 말할 수 있을 시절을-그러니까 그의 기준, 생명수당으로 통장에 돈이 떨어질 날이 없던 오로지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관점이다.- 곱씹으며 눈앞의 벽을 넘었다. 물론 관용구가 아닌 물리적인 의미이다. 낡은 벽돌들이 쌓인 벽을 한발로 딛고, 손을 뻗어 담장을 짚고 넘어서 착지. 비록 최강의 크리쳐라는 수식어는 잿더미가 된 지 오래지만 그는 여전히 최강의 인류였다. 그런 그 위로 가볍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무겁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무게가 등을 짓눌렀다.
“메테오, 등 고마워!”
“밟으라고 한 적 없다.”
붉은 귀가 쫑긋거렸다. 고맙다는 말보다 등을 밟는 게 먼저인 그의 파트너는 현재 최강의 크리쳐이다. 담장을 넘지 못한 탄환이 벽에 박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본래라면 슬슬 편의점에 다시 출근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낡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출근 시간에서 10분이나 지나있었다.
“메테오, 이 쪽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쪽으로 가고 있어. 내 눈에도 도주로 정도는 보여.”
말해줘도 난리냐!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 맞지 않게 그의 파트너는 입술까지 삐죽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메테오의 머릿속은 곧 내야 할 공과금과 핸드폰 요금, 20분 뒤면 사라질 위기의 일자리, 도주로가 복잡하게 얽혀 엉망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이제와서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질문도 질문이라고 답이 나올 때까지 그의 머리를 떠다녔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시간은 7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거슬러 올라가는 김에 좀 더.
**
두 사람은 중앙에서 최대한 떨어진 안전지대에 첫 방을 구했다.
어차피 전화 몇 통이면 중앙까지 소식이 가는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물리적으로 떨어진 거리는 무시할 수 없단 게 메테오의 생각이었다. 그라하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을 가져와 중앙과 가까운 곳이 낫지 않겠냐고 의견을 개진했지만, 결과적으로 메테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A.O.C가 출동했을 때, 외곽의 안전지대는 오는 데만 족히 열흘은 걸렸다. 어차피 올 때까지 모를 거 아니냐는 그라하의 반문에 메테오는 그 열흘을 더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단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그라하도 그 의견에 찬성했다. 열흘을 더 평화롭게 지낸다는 건 꽤 매력적인 일이었다. 안 걸리는 게 최선이겠지만, 본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영원한 평화를 바라는 건 스스로도 양심이 없는 소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걸리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평화롭게 지내자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리하여 둘은 조금이라도 길게 평화를 누리고자 안전지대 가장 외곽의 파툼(Fatum) 안전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둘은 그때까지는 몰랐다. 내세울 경력 없는 사람에게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며 생명수당 없는 통장이 얼마나 빈곤해질 수 있는지 말이다.
A.O.C는 사람을 효과적으로 몰 줄 아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의식주의 근간이 되는 금융의 흐름부터 차단했다. 그라하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다면 둘은 통장에 있는 모든 돈을 보는 눈 앞에서 홀랑 뺏겼을 것이다. 이동 중 그라하가 뽑은 돈이 그들의 전 재산이 되었다. 당장 셋방의 보증금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외곽에서도 더 외곽으로 밀려난 낡은 주택가는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두 사람은 공인중개사를 따라 1층 코너의 집으로 들어갔다. 장정 둘이 서면 꽉 차는 현관만 봐도 사이즈가 나오는 방이었다. 창은 작고, 들어오는 햇살은 앞의 건물에 가려 희미한 한 줄이 다였다. 그라하는 어느새 화장실을 살펴보고 있었다. 꼬리가 하늘을 향해 솟았다가 내려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에게 이곳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미지의 공간에 가까워 보였다.
“본부의 1인실보다도 작다. 와, 이거봐. 메테오. 변기가 옥색이야.”
“물만 잘 내려가면 되지.”
“응, 그건 잘 내려가네.”
어찌되었든 몸을 누일 공간만 있으면 감지덕지였다. 두 사람의 첫 보금자리는 그렇게 코너의 작은 1층집이 되었다. 장점이라면 도서관이 가깝다는 것과 앞의 편의점이 마침 오전과 저녁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점이었다.
**
“너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왔냐?”
“그냥, 너가 잘 하고 있나 보려고 왔지.”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냐고 물어봤잖아. 똑똑한 녀석이 이럴 땐 왜 못 알아듣는 척이야? 또 잘렸어?”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축 처진 꼬리를 보면 답이 나왔다. 메테오는 매대의 정리를 끝내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마지막 캔이 홈에 걸리며 마찰음이 났다. 그라하의 귀가 작은 소리에도 움찔거렸다. 냉장고의 문을 닫은 후 메테오는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뻔뻔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그라하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괜한 음료수의 이름을 웅얼거리며 읽고 있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한숨을 참기 어려운 횟수였다.
“이번엔 이유가 뭔데.”
“컴퓨터 모니터를 깼어. 아니, 그냥 잡기만 했는데…”
보나 마나다. 갑자기 난 소리에 놀라 힘을 준다는 게 조절이 되지 않은 거겠지. 솔직히 그 심정을 아예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최강의 크리쳐였던 시절, 메테오 역시 일상생활에서 힘을 조절하기 어려운 일이 종종 있곤 했다. 물론,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진 않았지만. 메테오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카운터 위에 걸려있는 전자시계가 마침 일의 끝을 알렸다. 저녁 아르바이트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초록색에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조끼를 벗으며 메테오는 막 폐기 처리한 샌드위치를 그라하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내는 솜씨는 여전히 날쌨다.
“도서관이나 가자.”
그라하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고마워.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라하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붉은 귀가 석양을 받아 더 붉어 보였다. 메테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이기만 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다면 도서관에는 오지 않았을 텐데. 메테오는 뒤늦게 후회했다.
**
도서관의 외벽은 수리가 필요할 만큼 낡았다.
금이 간 곳도 간간이 보였다. 그러나 외관과 달리 그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이 가지런히 분류되어 있었다. 총 2층으로 구성된 열람실은 책장 사이가 성인 남자 한 명이 서면 꽉 찰 만큼 폭이 좁았다. 그런 식으로 2층까지 빼곡하게 차 있으니 장서의 수도 보기보다 어마어마했다. 그라하는 이 도서관을 처음 발견했을 때, 마치 금광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메테오는 별로 감흥이 없는 쪽이었다. 그에게 책이란 그다지 유용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실전 지식은 이론보단 몸을 통해 익히는 게 월등히 빨랐고, A.O.C 특성상 2인 1조의 시스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이란 것도 손에 꼽을 정도의 수였기 때문에 그는 전술 책도 그다지 깊게 읽어본 일이 없었다. 생존술을 제외하면 그가 관심을 가지고 읽은 책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라하에게 지식의 보고이자 금광과 같은 도서관이 메테오에겐 그저 정적이고, 어깨나 가슴이 책장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좁은 공간의 연속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가 도서관 카드를 만든 건 그라하가 책을 한꺼번에 많이 빌리기 위한 수단을 기꺼이 제공하고자 하는 선의였다. 이렇게 자주 들르는 것도. 그저, 아직 어린 파트너가 책조차 마음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 맘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를 굳이 덧붙이자면 이 도서관에 요리책이 다양하게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적은 재료로 그럴싸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자취요리 1000선은
그의 애독서가 되었다. 이 책은 맘에 든단 말이지. 메테오는 게맛살 그라탕 페이지를 눈으로 훑었다. 그 사이, 그라하가 뽑아든 책은 벌써 8권째였다.
“한 권은 남겨둬. 나도 오늘은 책 빌려야 하니까.”
“메테오도 책을 읽어? 오늘은 하늘이 두 쪽 나는 날인가?”
“저번에도 빌렸어. 매번 그렇게 과장되게 놀릴 셈인가.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냐?”
흐응, 그라하는 대답대신 귀를 쫑긋거리며 웃었다. 계속 하겠다는 뜻이 내포된 행동에 메테오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더 말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작은 무언가가 메테오와 책장 사이의 좁은 틈을 낑낑거리며 지나 그라하의 앞에 섰다. 머리 위로 톡 솟은 남색 귀가 쫑긋거렸다. 시선을 내리자 겨우 메테오의 허리에나 올까 말까한 어린 미코테족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표정은 인상을 잔뜩 찌푸려 뚱하고 맹랑하게 보였다. 그라하에게 맡겨놓기라도 한 양손을 내밀며 하는 말도 그랬다.
“그거 4권 내가 찜 해놓은 거에요.”
“뭐?”
그라하의 반문에도 여자아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내민 손을 흔들었다. 책 주인이라도 되는 양, 내놓으라는 기색이 당당했다.
“그거 내가 찜한 거라고요. 오늘 읽을 거니까 줘요.”
“너 몇 살인데 벌써 이 책을 읽는 거야? 어렵지 않아?”
“아저씨는 그게 어려울지 몰라도 난 아니거든요?”
메테오는 보고 있던 요리책을 덮고 흥미진진한 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라하는 맹랑한 꼬마의 태도에 퍽 당황한 듯 보였다. 귀가 보기 드문 움직임을 보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결국 잠시간의 대치 끝에 그라하가 책을 포기했다. 드문 일이었다. 두 손으로 받아야 될 만큼 두껍고 큰 책이 아이에게 내밀어졌다. ‘궤도 끝의 코스모스 4’ 라는 큰 타이포 뒤에는 토성이 그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었다. 아이는 책을 받아들고도 고맙단 소리 한번 없이 몸을 돌려 다시금 메테오와 책장 사이를 빠져나갔다. 틈을 빠져나가며 맹랑한 한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저씨 살 좀 빼요.”
이건 살이 아니라는 변명을 하기도 전에 아이는 서가를 빠져나갔다. 그곳엔 황당한 얼굴의 메테오와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그라하만이 남았다.
“웃지 마라.”
“푸,큽. 참고 있, 허.”
말 새로 튀어나오려는 웃음소리를 다잡는 숨소리가 컸다. 메테오는 그런 그라하를 한번 흘기곤 들고 있던 요리책을 그의 품 가득 쌓인 책의 첨탑 위로 올렸다.
“웬일로 너가 책 양보를 다 했냐.”
그라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이의 궤적이 남기라도 한 듯, 잠시 아이가 달려나간 서가의 끝을 바라보던 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메테오, 저 나이에 어른들이 읽는 책을 보는 애들의 특징이 뭔 줄 알아?”
“글쎄, 맹랑하다는 거?”
그라하는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외롭다는 거야. 아마 쟤도, 또래 사이에 잘 끼어들지 못해서 책만 보게 되었을거야. 그리고 어른들이 읽는 책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난 저렇게 어린 애들이랑은 달라. 난 어른이야, 하고.”
네 이야기냐는 구태연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메테오도 시선을 따라 아이가 달려나간 서가의 끝을 바라보았다. 외롭고 똑똑한 아이. 그는 시선을 내려 그라하를 바라보았다. 붉은 귀가 쫑긋거리고 다른 색의 눈을 가진 어린 미코테 아이를 떠올린다. 그 나이 때에 다름이란 건 쉽게 틀린 것이 되었다. 메테오는 문득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을 올리는 순간, 손끝이 찌릿한 감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건 때로 메테오에게만 찾아오는 기묘한 위험신호였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반대편의 서가 틈새로 시선이 마주쳤다. 건장한 30대의 청년. 다시 한번 손끝이 따끔, 신호를 보낸다. 그는 그라하가 들고 있던 책더미를 서가 한쪽에 내려놓았다. 은밀한 말이 행동의 뒤를 따랐다.
“오른쪽 서가에 이쪽을 쳐다보는 녀석들이 있다. 벌써 따라붙은 건가.”
“…하필 이런 때에. 어쩔래?”
“여기서 괜한 총질로 민간인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 다른 곳으로 유도하자.”
그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가 밖으로 나가는 그들을 따라오는 발걸음이 들렸다. 곧 메테오와 그라하는 서가 맞은 편, 사서들이 앉아있는 책상을 뛰어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탕!
귓가를 스치고 가는 총알이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뒤이어 비명소리가 들렸다.
**
그리고 다시 이야기는 이곳으로 돌아온다.
이런 습격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인과 같이 거리에 뒤섞여 있어도 둘은 결코 일반의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메테오와 그라하 모두 그걸 뼈저리게 몸에 되새긴 이들이었다.
둘은 습격을 대비해 골목길에, 좁은 공중전화 박스에 한 번 쓰고 버릴 무기들을 숨겨두었다. 이를테면 곧 날이 빠질 것같이 오래된 잭나이프나 탄창이 하나 남은 권총 같은 것들.
종이박스가 탑을 이룬 골목에는 권총 두 자루가 있었다. 한 놈의 어깨가 총알에 꿰뚫리며 굉음이 났다. 으아아악! 그라하와 메테오는 그 비명이 동력이 되는 사람들 마냥 앞으로 튀어나갔다. 총을 든 손을 걷어차고, 팔로 목을 껴안고 조른다. 일련의 행위들은 물 흐르듯 막힘없이,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두 사람이 기절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A.O.C는 최강의 인류와 크리쳐를 고작 2명으로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또다시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둘은 총을 챙겨 달렸다. 발걸음은 민간인을 피해 달리다보니 어느새 외곽의 호숫가였다. 오가는 사람이 적어 호숫가는 언제나 고요하고 스산했다. 호숫가 주변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무성한 가지들이 부딪히며 기묘한 음악을 연주했다. 두 사람과 요원들은 호숫가를 배경으로 서로를 겨냥한 채, 대치하게 되었다. 그라하는 아까 들고 온 총을 확인하곤 볼멘소리를 했다.
“메테오, 이거 대 크리쳐용 살상탄이야! 날 정말 크리쳐 취급하고 있잖아?!”
“새삼스레 그래. 너도 그걸로 날 쐈잖아.”
“그건 다르지!”
메테오의 말에 그라하의 귀가 축 쳐졌다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쫑긋거렸다. 두두두두. 상공을 가르는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은 동시에 위쪽을 올려봤다. A.O.C의 로고가 양쪽으로 크게 그려진 헬기가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헬기까지 올 정도로 유명인사가 된건가.”
“그 농담 재미없어.”
“별로 재밌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야. 농담도 아니고. 팔로 받쳐주면 뛰어 올라갈 수 있겠어?”
메테오의 말에 그라하가 그의 어깨와 고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헬기를 번갈아 보았다. 거리와 각도, 그에 따른 궤도를 가늠하는 듯 가늘어졌던 눈이 장난스레 곡선으로 휘어졌다. 복잡한 수식의 계산이 다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헬기의 거친 프로펠러 바람이 지상으로 쇄도하는 탓에 눈이 시렸다.
“응, 가능해. 대신 등을 빌려준다면!”
“또 등이냐. 좋아, 제대로 박살 내고 ㅇ…”
“두 사람은 항복해라! 그러지 않으면, 발포하겠…”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둘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도 마찬가지였다. 헬기까지 대동했으니 무서울 것이 무엇이랴. 아무리 최강이라 한들 헬기까지 뛰어 올라갈 수는 없을 거라는 게 상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예측한대로 되는 일이 없는 법이다. 서로를 향한 으름장은 하나같이 마침표를 찍지 못했는데, 바로 그 가운데에 등장한 소녀 때문이었다.
“이거 영화 찍는거에요?”
아까 도서관에서 당당하게 그라하로부터 책을 갈취한 그 아이였다. 아이의 손에는 일회용 필름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영화의 클리셰라면 여기서 아이를 인질로 한 쪽이 항복을 요구해야 할 장면이었다. 관객들도 모두 그런 장면을 기대할 것이다. 야비한 악당과 그로 인해 스스로를 포기하면서까지 한 어린 생명을 구하는 주인공. 그러나 지금 이 장면의 문제는 양쪽 모두 영웅의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라하와 메테오는 말할 것도 없고, A.O.C마크가 새겨진 방탄복을 입은 요원들도 모두 안전과 자유를 수호하는 이 시대의 마지막 정의의 수호자였다. 최소한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누구도 클리셰의 장면처럼 아이를 인질로 잡으려 하지 않았다. 영웅은 그런 야비한 짓을 하지 않는다! 지독한 침묵 속 대 크리쳐 살상탄의 총구를 여전히 그라하의 가슴 쪽으로 고정시킨 요원이 입을 열었다. 번쩍이는 고글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애기야, 여긴 위험하니까 일단 집으로 가지 않겠니?”
“그렇게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텐데.”
아이는 메테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까처럼 맹랑했다는 소리다. 아이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꼭 쥔 채 고개를 저었다. 어찌나 단호한 지 누구도 그 애를 억지로 끌어당겨 무대에서 내려보낼 생각을 못했다.
“싫어요! 안돼요! 호수 괴물을 찍어가야 한단 말이에요!”
“얘야 다시 한번 말하겠는데, 지금은 위급상황으로…”
“호수 괴물?”
그 순간이었다. 그라하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별안간 검은 촉수가 호숫가로부터 솟았다. 그 크기가 엄청나 수목의 그림자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거멓게 미끌거리는 촉수가 상공의 헬기를 장난감 잡듯 낚아채어 반대편 숲으로 내던졌다. 헬기가 터지며 불길이 멀리서 치솟아 올랐다. 아이를 설득하려던 요원들의 총구가 뒤늦게 촉수를 향했지만 늦었다. 문어같은 큰 머리와 일자의 눈동자가 수면으로부터 튀어나오며 그들을 한 번에 낚아챘다.
메테오와 그라하는 그보다 행동이 빨랐다. 파도가 범람하듯 덮쳐오는 촉수를 피해 메테오는 굳어버린 아이를 품에 안았고, 그라하는 대 크리쳐 살상탄을 다가오는 두가닥의 두꺼운 촉수를 향해 쐈다. 큰 발포음과 함께 숲에 남아있던 새들이 날아가고 끊긴 촉수는 호수 안으로 조약돌처럼 빠졌다. 큰 해일같은 호수의 범람이 한차례 찾아오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생사 여부와 상관없이 홀딱 젖었다.
메테오는 아이를 안고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라하의 총이 다시 한번 큰 소리를 내며 오른쪽 눈에 명중했다. 그어어, 생체형 크리쳐로 보이는 것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목적성을 잃은 촉수들이 헬기의 프로펠러처럼 빙빙 돌며 주변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그라하는 줄넘기를 하는 사람차람 가뿐하게 두꺼운 촉수를 뛰어넘었다. 시선이 호수의 뒤를 향했다.
“메테오, 아이는 괜찮아?!”
“괜찮아, 여기 있어. 목에 팔 잘 두르고 있어. 좀 놀랐을 뿐이야.”
“좋아. 셋 세면 같이 쏘는거다! 하나, 둘!”
“쉬이, 손으로 귀를 막으렴.”
메테오는 한손으로 아이의 등을 끌어안고 한손으로 크리쳐 살상탄이 든 총을 들었다. 무거운 총신을 한 손으로 잡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품의 아이를 놓을 순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인류를 지키고자 하는 이 시대의 수호자니까. 총신의 무게만큼 묵직한 방아쇠에 검지를 걸고 그는 총을 어깨에 걸거쳐 올렸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거무축축한 눈알이 이쪽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는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어깨를 부술 듯한 반동과 함께 몸이 흔들리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크리쳐의 머리가 눈알과 함께 터지는 것이 시선의 끝에 보였다. 미안하다. 메테오는 어설픈 손길로 아이의 등을 두들겼다.
“괜찮니?”
그라하가 다가오자 아이는 메테오에 가슴에 코를 박고 있던 얼굴을 떼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콧물, 눈물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지만 여전히 나름 단호한 고갯짓이었다. 다행이네. 집이 어디야? 아이가 그라하의 다정한 질문에 대답하려는 때였다. 호수의 수면으로부터 촉수가 뻗어져나왔다. 마치 마지막 발악마냥, 빠르게 파도와 함께 솟구친 그것은 그대로 그라하의 가슴을 꿰뚫었다.
뜨거운 피가 메테오의 뺨에 튀었다. 아이의 비명소리, 황망한 그라하의 눈빛.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채찍이 공기를 가로찢는 듯한 소리. 찰나의 순간 수많은 감각이 메테오를 덮쳤다.
그라하의 몸이 촉수에 꿰뚫린 채 몇 번인가 수면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러나 촉수는 기묘하게 심장을 피했기 때문에 그는 즉사하지 않았다. 게다가 촉수를 품에 안은 채로 상처를 수복할 수도 없다. 이 순간만큼은 최강의 크리쳐에게 도와 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메테오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땅에 내려주었다. 휘청거리는 아이의 어깨를 잡고 그는 외쳤다.
“최대한 숲 안쪽으로 뛰어! 당장!”
아이는 목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등을 돌려 휘청거리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작은 몸이 호숫가의 큰 나무 뒤로 가려지는 걸 본 후에야 메테오는 뻗어지는 촉수를 향해 총을 갈겼다. 급격한 반동과 함께 총알이 날아가고 촉수가 끊어져 뒹굴었다. 촉수는 땅에서의 전투가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빠르게 호수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라하를 꼬챙이 마냥 제 끝에 끼운 촉수도 마찬가지였다. 메테오는 총을 등에 메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익사는 오래 걸리는 죽음 중 하나였으며, 여전히 촉수가 끼워진 채로는 상처도 제대로 된 수복이 어려울 게 뻔했다.
수면 아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두컴컴했다. 물속에서의 총신도 뭍에서보다 무겁고 눅눅하게 느껴졌다. 그라하는 속수무책으로 촉수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물방울이 흔들리며 솟구쳤다.
지금입니다. 최강의 크리쳐에게도 클리셰를 꿰뚫을 동료가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당신은 무슨 소리를 들은듯한 기분이 든다. 내면의 목소리도, 그라하의 목소리도,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머릿속에서부터 울리는 기묘한 행동지침. 그러나 거부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가끔은 얄밉고, 가끔은 너무나 어리게 느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당신의 파트너에게는 당신이 필요하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당신은 총신을 든다. 무거운 방아쇠를 당긴다. 죽음으로써 선사하는 생명이라는 아이러니가 당신의 손끝에서 피어난다. 총알이 그라하의 몸과 촉수를 동시에 꿰뚫는다. 물속에서도 그 생물의 비명소리는 뚜렷하게 들린다. 아니 오히려, 더 아름답고 고와서 마치 선원들을 유혹했다는 세이렌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거멓게 변해가는 시야의 끝에 다시 눈을 뜨는 당신의 파트너가 보인다.
부탁한다. 말 대신 둥근 물거품이 떠오른다. 시야가 까맣게 물든다.
암전.
그라하는 되살아났다.
끊겼던 숨이 다시금 이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가슴은 어느새 다시 당신의 살로 가득하다. 공허를 메꾸는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하고 속을 뒤집어 놓는다. 난생 처음 겪는 죽음과 탄생의 연속은 구역질이 날 만큼 어지러웠다.
촉수가 빠져나가 공간이 수복되며 터진 첫 숨은 거친 숨소리 대신 둥근 물거품의 형태로 떠올랐다. 깊은 호수의 바닥을 향해 떨어져가는 파트너가 보였다. 숨방울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총을 찾을 시간도 없었다. 차분하게 총을 쏘기엔 당신의 몸을 감싼 분노의 크기가 컸다. 그라하는 손을 뻗는다. 손이 질척한 진흙같은 외피를 파헤치고 들어간다. 손등이 따끔 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독쯤, 다시 한번 죽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다. 분노는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의지와 같았다. 죽여버리겠어! 그는 손끝에 잡히는 심장 같은 것을 잡아 뜯었다. 가냘프고 여린, 아름다운 비명이 물결을 타고 귀가 먹먹할 만큼 흘러들었다. 손 안 가득한 생명의 핵을 잡아 부순다. 그라하는 마지막 반항같이 날아오는 촉수를 걷어찼다. 곧 진흙은 형체를 잃고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따끔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메테오!”
그라하는 점점 호수의 어둠으로 가라앉는 파트너를 향해 헤엄쳤다.
**
메테오는 눈발이 날리는 설원에 서 있었다. 몸을 감싸는 감각은 하나같이 차갑고 서늘하다. 낯익은 듯 낯선 설원의 풍경이 자신이 보는 마지막 주마등인가, 남들은 인생이 빠르게 지나간다던데. 다음순간 메테오는 시선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걸 느낀다.
호숫가로 겨우 올라온 그라하는 잔뜩 젖어 숨을 쉬지 않는 파트너의 이름을 신음처럼 불렀다, 메테오, 메테오. 아무리 불러도 무겁게 가라앉은 눈꺼풀이 다시 떠지는 일은 없었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랠 새도 없이 그라하는 젖은 셔츠 위로 손을 댄다. 가슴의 중앙을 어림잡는 일은 어렵지 않다. 손꿈치는 중앙에, 팔꿈치를 곧게 펴고. 그는 떨리는 숨을 진정하고, 체중을 실어 가슴을 누른다. 메테오. 일어나! 오래도록 잠들 듯 누워있는 그를 보는 건 너무 오랜만이어서 자꾸만 손끝이 떨렸다.
메테오는 어느새 어두운 동굴 안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동굴의 천장은 균일하지 않은 굴곡들로 가득하고 그 틈을 그늘이 채우고 있었다. 여전히 서늘하고 춥다. 메테오는 제 위로 기울어지는 그림자를 본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시야로 빨간 머리가 노을처럼 일렁였다. 그라하? 그는 신음처럼 파트너의 이름을 불렀다.
그라하는 한손으로 메테오의 머리를 젖히고, 다른 손으로 젖은 턱을 들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재촉했다. 정신차려, 빨리 해! 무방비하게 열린 입 새로, 고개를 기울인다. 4년 전과 달리 턱에 자란 수염이 젖은 와중에도 까슬했다. 입술도 조금 텄나, 그간 야간까지 일을 하던 모습이 떠올라 끝이 메마른 입술에 조바심이 났다.
숨을 불어넣는다.
메테오는 밀려드는 뜨거운 숨이 누구의 것인지 깨닫는다. 차디찬 겨울의 동굴은 희미하게 사라지고, 또다시 머릿속으로 어떤 말들이 선명한 목소리를 타고 차오를 듯 넘실거렸다.
자, 일어날 시간입니다. 영웅, 아직 세상엔 당신이 필요하니까요.
메테오는 그 부름에 눈을 떴다. 눈을 뜨기 무섭게 큰 그림자와 그보다 작은 그림자가 메테오의 몸 위로 그늘졌다.
“메테오!”
“아저씨!”
뭐야, 라고 말하기도 전에 가슴부터 느껴지는 육중한 무게에 그는 입을 열지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그는 팔을 겨우 둘러 둘의 등을 둘러안고 토닥였다. 그래. 내가 죽는다면 너희들 때문이다. 메테오의 신음같은 말에 그라하가 크게 웃었다. 한번 죽고 되살아난 후에도, 그 미소는 여전히 앳되게 빛났다.
**
낡은 가로등 불빛에 그림자 세 개가 일렬로 길게 늘어졌다. 가운데의 그림자가 유독 작았다. 그만큼 아이의 손도 너무 작아서, 메테오는 손에 힘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썼다. 맹랑하던 태도와 달리 아이는 생사를 함께한 두 사람을 금방 따랐다. 아이의 집은 두 사람의 집에서 멀지 않았다. 외곽에서도 외곽으로 밀려난 낡은 주택가는 밤이 되면 쥐죽은 듯 고요했다. 스산한 골목길 왼쪽의 세 번째 집.
아이의 집은 불이 꺼져있었다.
“부모님은?”
“일. 늦게와요.”
메테오의 질문에 아이는 건조하게 대꾸했다. 파란 대문 앞에서 두 사람은 손을 놓았다. 아이는 아쉬운 듯 양손을 쥐었다 피길 몇 번 반복하다가 두 사람을 올려보았다. 이별의 시간이었다. 말주변이 없는 메테오를 대신해 그라하가 허리를 숙여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두 사람의 귀가 모두 쫑긋거렸다. 아이의 뺨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는 손길이 총신을 다듬는 손길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오늘 있었던 일은 너무 깊게 생각하지마. 알겠지? 그리고 호수로 가까이 가지 말고.”
영민한 구석이 있는 아이는 더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네. 그라하의 손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이 따뜻해지는 장면이었다. 아이가 그라하 뒤의 메테오를 한번 바라보고, 또 제 앞의 그라하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지, 아이는 몇 번 손을 꼼지락 거리고 시선을 두리번 거리고서야 입을 열었다. 주머니 안의 사탕 두 개와 함께.
“오늘, 감사했어요. 책도, 호수에서 일도…”
“아냐, 아저씨들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란다.”
그라하의 말에 아이는 수줍은 듯 사탕을 쥔 손을 두 사람 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이 소중히 감싸고 있던 것은 싸구려 비닐에 과일 사진이 프린팅된 사탕이었다. 아이를 들여보내고 두 사람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언제 호숫물에 푹 젖었는지 물맛이 나는 사탕이었다. 메테오는 사탕의 껍질을 그라하의 주머니에 넣고 앞서 걸었다. 이윽고 그를 뒤따라오는 걸음이 분주했다.
“또 이러네! 이거 진짜 나쁜 버릇이라고. 난 쓰레기통이 아냐.”
그라하가 말을 할 때마다 휘저어지는 꼬리를 보며 메테오는 작게 웃었다. 그는 대답 대신 그라하의 머리를 한차례 헝클였다. 손 끝에 닿는 머리카락은 아직 축축했다.
사탕에선 물맛과 희미한 과일맛이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