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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청서(@Team_Laputa)의 CoC 7th [클리셰 SF 세계관의 크리쳐는 그어그어하고 울지 않는다] 월드세팅을 차용했습니다.
1.
안경을 쓴 남자는 그날 일을 그렇게 회상한다.
아내의 장례가 예정되어 있던 날 아침, 세상은 무너졌고 안드로이드들은 일제히 가동을 중지했다. 혼란이 찾아왔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폭동을 일으켰고 안전지대를 지배하던 노령의 독재자는 공식적으로 수배되었다. 그가 혼란 속에서 앙심을 품은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수배지에는 사람을 찾는다는 선전이 붙어 있었다. <대역 죄인>, <세계의 영구 평화를 위협한 테러리스트의 신상 제보 요청>이라 적힌 헤드라인이 보였다. 수사에 협조하는 이들에게는 체제가 복원되는 대로 가족형 안드로이드의 대기 순번을 앞당겨 주겠다는 문구도 함께였다. 안드로이드가 제공하는 평화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 이들은 보금자리를 파괴하고 사랑하는 이를 앗아간 신원 미상의 테러리스트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중 짚이는 구석이 있다는 이들은 안전지대의 임시정부를 찾았고, 남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채색의 사정청취실에 앉아 남자는 안내받은 순서대로 무인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조립식 의자가 당겨지며 끌려가는 듣기 싫은 소리도 함께 녹음되었다.
다 떨어진 군복을 입은 행인이 수정공의 남편을 자칭하길래 미친 거지인가 했어요. 딱한 정신이상자거나, 오작동을 일으킨 안드로이드거나… 어디 구걸이라도 하러 가나 싶었죠. 네, 맞아요. 고동색 머리에 수염이 지저분하고, 덩치가 크고, 눈은 짙은 벽안이었어요.
마지막으로 봤던 게 그날 아침이네요.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였고, 음, 취객인가 했는데 술 냄새는 안 났고요. 크리스마스 기념 몰래 카메라인가 했네요. 그 뒤로는 중앙 관리 체제 방향으로 사라졌어요. 수정공을 만나러 가겠다면서요. 안전지대를 이 꼴로 만든 건 그 자가 분명해요. 사람이 어찌나 악랄한지, 제 안경 모양을 가지고도 트집을 막 잡더라니까요.
기억나는 건 다 말했어요. 이제 약속대로 제 아내를 다시 만나게 해 주실 거죠?
2.
새로운 정부가 세워졌다. <테러> 이후, 임시정부는 체제 재건을 목표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시켰다. 기댈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정부의 등장은 희소식으로 다가왔다. 대량학살과 사기 혐의로 수배된 구 체제의 독재자는 여전히 생사불명이었고, 안전지대를 붕괴시킨 사상 최악의 테러리스트는 사람들의 입에 무성한 소문으로 오르내렸다. 기나긴 겨울을 끝낸 그야말로 난세의 영웅이다, 신정부의 지지율 끌어올리기용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떠도는 말은 많았으나 수 년이 지나도록 밝혀지는 건 없었다.
혼란을 틈타 안전지대를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도시 외곽으로 추방된 가족을 찾으러 나선 이들, 줄글로만 접해온 벽 너머의 세계를 동경하는 이들, 단순히 생활할 터전을 찾아 떠도는 이들. 감시하는 이는 사라졌으므로 이유를 댈 필요도 없었다. 날은 천천히 더워졌고, 안전지대 밖에도 새로이 촌락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이 퍼지며 도시에는 이탈자가 늘어갔다.
도시의 변두리, 안전지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소형 위성촌에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다. 신생하는 도시에는 일손이 대거 필요했다. 일일 용역의 신상 따위야 수배지에 실리든 말든 눈앞의 생존과 배급이 우선인 사람들에게는 관심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기억 상실에 걸린 전직 독재자와 할 줄 아는 거라곤 육체노동뿐인 퇴역 군인 겸 전직 테러리스트에게는, 그야말로 완벽한 생활환경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었으나 두 사람은 그 어드메서 살았을 것이다. 수배된 테러리스트와 인상착의가 닮았다는 사내가 붉은 머리 소년과 함께 종종 교외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유력자들은 이탈 주민 사이에서 컬트적 인기를 얻기 시작한 테러리스트의 신상이 공개되는 것이나 구 체제의 귀환을 원하지는 않았으므로, 장기간의 감시 명령을 내릴 뿐 그 이상을 결단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이어지던 제보 또한 안드로이드를 매개로 한 보상 제공이 불가능하다고 공표된 뒤로는 자른 듯이 끊어져 나갔다.
관심과 소문의 바깥, 사상 최악의 테러리스트를 둘러싼 최후의 기록은 마트에서 케첩을 고르는 파파라치 사진으로 남았다.
3.
침대 하나로 자기에는 좁다, 그러니까 같이 자고 싶다. 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
기억 안 나면 됐고.
…….
졸린 건가?
…….
그래, 오늘은 따로 자자. 이불 가져올게.
4.
처음 몇 달 간, 당신은 어떤 명칭에도 반응했습니다. 고장난 기계처럼 뉴스에서 반복하는 방주, 중앙 관리 체제, 심지어는 수배 중인 그라하 티아의 이름에도 잠을 깨서는 저를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때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사이 같습니다. 당신은 저를 파트너라고 불렀고, 이따금 이름을 부를 때도 있었습니다. 저도 당신을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두 눈썹을 내린 당신이 낯선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외출할 때면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하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여름철의 검은 옷은 쉽게 습기가 차올랐습니다. 저는 그 점을 들어 검은 의복의 갑갑함을 여러 번 언급하였는데, 당신은 외출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무척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어떤 종교에서는 감추어야 할 외모를 검은 의복으로 덮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머리카락과 눈색을 싫어하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같은 방을 사용했습니다. 당신은 자주 잠을 설쳤지만 더블베드를 고집했습니다. 숙면을 위해 다른 침구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저의 제안에도 애매모호한 표정만을 지었습니다. 잠든 당신의 신체에서는 시끄럽고 독특한 소리가 났습니다. 듣기 싫지 않나? 당신이 그렇게 물었을 때 저는 수면에는 방해가 되지만 듣기 싫은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일몰이 평시보다 늦어지기 시작할 무렵, 당신은 사람들이 우리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서는 외출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당신은 귀가할 때마다 책과 영화를 다량으로 가져와 주었습니다. 이야기는 실로 흥미로웠지만, 그 안에도 당신과 나에 대한 이야기는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방주가 남긴 기록 속에는 도서관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자료를 남겨두는 곳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억의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흐려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을 후세에 전하고 남기기 위해 도서관이라는 저장소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장소라면 우리에 대한 자료도, 당신이 저를 홀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이유도 적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저는 도서관에 가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먹던 그릇을 내려두고 저를 아주 오랜 시간 바라보았습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낯선 소리로 웃기 시작했습니다. 눈가에 주름이 늘어 있었는데 그게 당신의 유순한 미소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의자에서 일어나 제가 앉은 자리로 왔습니다. 어깨가 잡혔고, 상반신이 기울어졌고, 중심을 잡으려는데 당신의 가슴에 이마가 닿았습니다.
품에서 시원한 냄새가 났습니다.
맡아본 적이 있다고 말하자 당신은 다시 웃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첫 포옹이었습니다.
5.
당신은 여전히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물어보아도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런 것보다 당장의 저녁 식사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식사 시간이면 유들해지는 당신의 눈웃음을 좋아했기에, 저도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음식을 가리지 않았지만, 당신은 항상 새로운 것들을 조리해 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몇 가지는 특별히 입에 맞았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지나칠 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저녁으로 구운 버섯이 먹고 싶다고 말하자 당신은 일주일 내내 식탁을 버섯으로 장식했습니다. 그러다 피부에 음식물이 묻으면, 당신은 저를 가만히 보더니 냅킨을 건넸습니다. 감사를 표시해도 받아주는 날은 드물었습니다.
당신은 술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캔에 담긴 차가운 맥주를 즐겨 마셨습니다. 음주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값비싼 적포도주를 선호한다는데, 당신은 유독 포도주가 아닌 맥주만을 찾았습니다. 기호의 문제라면 기억해 두어야 할 것 같아 하루는 이렇게 묻기도 했습니다.
“포도를 싫어합니까?”
“아니, 과일은 안 가려.”
“하지만 포도주는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건…… 별로 맛이 없어서.”
이후로도 당신이 포도주를 입에 대는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홀로 편의점을 방문해 마셔본 포도주의 맛은 나쁘지 않았기에, 맛보다는 가격의 문제가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은 넓지 않았습니다. 욕실 겸 화장실은 침실에 달린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속옷을 다 착용하지 않은 채로 욕실을 나오는 습관이 있었는데, 동성인 제가 그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보기 드물게 당황하곤 했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자, 당신은 다시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당신은 제 몸을 만지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손이 닿아 있으면 습관처럼 손바닥을 잡았고 잠들기 전 함께 누운 자리에서는 귀나 꼬리처럼 털이 나 있는 부분을 만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의미가 깊은 행위로 보였습니다. 책에서는 그런 접촉이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 하던데, 한때 우리는 가족이었거나 연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의 관계를 ‘오랜 직장 동료’라는 명칭으로 일축했습니다. 직장 동료 사이에도 몸을 만질 수는 있는 모양이지만, 당신이 제공하는 접촉은 그런 것과는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더운 몸을 감각하는 일은 즐거웠습니다. 관련 서적을 추가로 읽은 뒤, 저는 그 더위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생식 기간의 흥분 상태일 것이라 결론지었습니다.
“……흥분이 되냐고?”
“생식적인 의미에서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애착이 깊은 타인의 몸을 만지는 것으로 흥분을 얻는다고 합니다.”
“…….”
“당신은 저를 안거나 만지면서 흥분을 얻는 것 같습니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저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넌 이럴 때도 영화 속 AI나 할 법한 대사를 하냐….”
“저와의 신체 접촉으로 당신이 흥분하는지 궁금합니다. 입을 맞춰 주세요.”
입을 맞추는 행위를 상상하자 어째서인지 주변 공기가 덥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아주 차가운 겨울날의 동굴이 떠올랐습니다. 눈 덮인 동굴은 서적에 담겨 있는 입맞춤에 대한 정보와는 조금도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 괴리의 까닭을 질문하자 당신은 아무런 말 없이 먹고 있던 새송이버섯을 두툼하게 잘라 내밀었습니다.
“이건… 버섯 아닙니까?”
“간장 찍어서 먹어봐. 사람 혀도 그거랑 비슷해.”
“물음에 대한 답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와의 신체 접촉으로 흥분하는지가 알고 싶은……”
“……아주 아닌 것도 아니지만, 그거나 먹어. 대답 안 할 거야.”
당신은 그렇게 말하며 이쪽을 돌아보았습니다. 턱을 찌르는 젓가락에 입을 벌리자 따뜻하고 짭짤한 것이 혀 위로 얹혔습니다. 입에 문 버섯에서는 짠 맛과 약간의 감칠맛, 말캉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졌습니다. 당신의 입가에 돋아난 수염을 핥아도 이것과 같은 맛이 날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6.
우연한 계기로 당신에 대한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그 입으로 말해주지 않은 것들이 세상에는 산적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AOC라는 조직의 존재가 그러했습니다.
7.
AOC의 역사를 다룬 책을 들고 당신에게 갔습니다. 백 년 전 벌어진 일은 안전지대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듯했습니다. 내밀어진 책을 보더니 당신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당신은 낯선 방문객에게 현관문을 열어줄 때와 비슷한 어조로 ‘들고 있던 책을 읽었느냐’ 물었습니다. 읽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당신은 제게서 책을 빼앗아 들었습니다. 당신의 손짓에 낡은 책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습니다.
찢어진 종이조각들이 바닥에 볼품없이 나뒹굴었습니다. 그 위에 적힌 알아보지 못할 활자들 하나하나가 당신의 발치에서 서럽도록 일그러졌습니다.
“이런 건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잖아.”
누군가에게 읽히기만을 기다려왔을 문장들의 조합이, 다시는 읽힐 수 없는 형태가 되어 발 아래에서 구겨져 갔습니다. 당신이 위협적인 소리로 무어라 외치는 것이 들렸습니다. 저를 향해 하는 말이라는 건 알 것 같았는데,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고를 담당하는 신경에는 이상이 없었는데 두 귀에 닿는 당신의 목소리만이 가 본 적도 없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부스러졌습니다.
“자그마치 백 년이야. 네가 저지른 일들, 날 포함해 네게 대적한 사람들을 죽이고 내쫓았던 기억들. 그게 돌아오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당연하지. 네가 지금 어떻게 무사하다고 생각해? 지난 기억이 널 무너트릴 수도 있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당신의 말에 반발하는 것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감각을 받아들이는 전두엽이 차갑게 식고, 시신경이 조금 둔감해졌고, 시선 끝에서 당신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냐, 네 생각은 상관없어.”
“……!”
“너는 지금 무사하고, 나는 네가 이대로 살아 있기만 해도 충분하니까.”
그러나 당신은 제 할 말만을 꾸역꾸역 이어갔습니다. 시야가 평시의 절반 수준으로 좁아졌습니다. 눈물이 치미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내 말을 조금도 듣고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 책을 찾았는지, 어떤 과거를 알고 싶어 했는지, 당신이 말해주지 않은 우리에 대한 것들을 지난 세월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묻지도 않고 책을 찢어버린 당신이 지독하게 원망스러웠습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당신의 팔을 강하게 잡아 멈추었습니다.
“……못됐어.”
“뭐라고?”
“너 말이야…… 못됐다고.”
“방금 너…라고 한 건가?”
“그래, 너, 순 제멋대로에다 완전 못돼먹었다고!!”
“……그라하?”
“이 좀생이, 벽창호, 머저리……!”
“라하….”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말 놔도 돼.”
“싫… 싫습니다.”
“그냥 해줘. 듣고 싶어서 그런다.”
“……싫다니까, 맨날 멋대로야. 곰 닮은 게.”
그렇게 말하며 혀를 죽 내밀었더니, 당신은 정말로 재봉선이 일그러진 곰인형 같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8.
당초 안전지대의 임시정부는 제대로 구성되지 못했다. 지도자의 공백으로 발생한 혼란기를 그들은 변함없는 방식―불의와 유착 말이다―으로 해결했다. 사상 최악의 테러리스트와 그의 동거인 겸 실종 상태인 독재자의 소재지는, 진작 파악되어 있었으나 별다른 처분이 내려지지 않은 채로 수 년 더 방치되었다. 명백하게 인간을 벗어난 힘을 지녔다고 추정되는 그들을 자극해 봐야 신생정부의 기반 강화에는 아무런 득이 없을 것이며, 그들이 사회에 반기를 들지 않고 은신을 결정한 이상 놓아주는 것이 실리적이리라는 평론가들의 설전은 그런대로 맞아떨어졌다.
어느 겨울, 스스로를 ‘안드로이드 재보급을 위한 시민 연대’ 소속이라 밝힌 남성이 죽은 아내를 되살려내지 않는다면 테러리스트의 거처를 타블로이드지에 넘기겠다며 임시정부의 청사에 찾아와 소동을 피우는 영상이 시민들의 시청각 단말을 타고 퍼져나가 일약 <미싱 안드로이드 신드롬>을 일으켜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제거 명령은 손쉽게 떨어졌다. 수십 년이나 이어져 온 체제를 단신으로 전복시켰을 만큼 비상한 힘을 지녔다는 테러리스트를 칩거 중에 제거할 명분이 없었을 뿐, 결국 관리되지 않은 테러리스트의 존재는 언젠가 임시정부의 존속 또한 위협할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이 득세했다. 안전지대 붕괴 사건으로부터 수 년이 지난 만큼 그의 힘도 노쇠했을 것이라는 낙관론 또한 이를 거들었다. 크리쳐의 존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반성하는 이들의 참회와 눈물도 함께 역사 속에 묻혔다. <테러> 이전까지 이어진 긴 평화 속에서, 크리쳐와 대면했던 기억조차 잊은 채 평화에 녹아든 안전지대의 새로운 결정권자들은 사상 최악이라는 오명의 테러리스트조차도 기껏해야 구 AOC의 최첨단 안드로이드쯤 되겠거니, 넘겨 짚고 말았다.
그렇게 투입 가능한 전력 중 정예만으로 구성된 별동대가 중대 규모로 파견되었다. 인원수로 치면 이백에 이르는 규모였다. ‘특수 군복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당해낼 인간이 있을 리 없다.’ 대위 되는 이는 그렇게 판단했다. 임무 계획서를 받아든 행정권자는 무슨 수를 쓰든 좋으니 시끄러워진 여론을 빠른 시일 내에 잠재울 것을 요구했다. 그 무렵 대위의 통신 단말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상부의 압박이 날아들었다. 대부분이 시민들에게 안심할 수 있는 연말을 선사해야 한다는 소리였고, 디데이는 짜 넣기라도 한 듯이 정해졌다.
9.
그날 백화점에 손님은 단 둘뿐이었다.
대피 경보는 시민들의 신체에 이식된 정보통신용 시청각 단말을 통해 이루어졌다. 안전지대 근교의 위성도시에서 <테러>로부터 수 년이 지나도록 단말 이식을 거부 중인 시민 역시 두 명뿐이었다.
신정부가 구 체제와의 차별화를 선언한 만큼 단말 이식은 강제가 아니었기에 시외에는 단말을 불신하여 거부하는 이들도 드물게 남아있었으나, 대부분은 단말이 제공하는 이점―통신세 절감 등―에 감화되어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이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표적인 두 사람은 어느 쪽이든 예외였다. 단말을 신용하고 말고의 문제에 앞서, 우선 인간이 아닌 몸이다.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크리쳐의 몸을 행정직 공무원들에게 내보일 수는 없었고, 크리쳐가 맞는지조차 불분명한 그라하의 신체는 이식 장치에 연결하는 순간 고압 전류를 뿜어내지나 않으면 다행일 거였다. 신체 구조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한다 쳐도, 전직 테러리스트와 생존한 독재자라는 화려한 전력을 이웃에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미친 고생을 하며 얻어낸 자유를, 허망하게 날리고 말 것이 뻔했다.
대위는 두 사람의 신원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시민들에게 단말을 경유한 대피 명령을 내렸다. 12월 24일, 저녁 6시부터 익일 0시까지, B시의 백화점 반경 1km에 민간인은 출입하지 말 것. 작전사항을 가족 외 타인에게 발설하지 말 것. 테러리스트의 검거 소식을 기다리면서 안전한 곳에서 유쾌한 성탄 전야를 보낼 것…….
고층 건물을 둘러싸고 군용차와 이백여 명의 군인들이 늘어섰다. 예보를 벗어난 기상 악화로 눈이 되다 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작전 개시에는 무리가 없었다. 동거 관계로 알려진 표적 둘은 예상대로 18시가 조금 넘은 시각 B시 남부의 백화점에 나타났다. 한 달 전부터 B시 내의 모든 레스토랑 예약 정보를 감찰해 계획한 것이다. 어그러질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 사복 차림의 군인들이 가족인 척, 연인인 척 매대 앞을 지나다녔다. 표적은 의심이 없어 보였다. 큰 쪽은 줄곧 무표정했고, 작은 쪽은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 할인 코너에 이를 때까지 한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둘은 종종 손을 쥐기도 하고, 소지품을 들춰 보기도 하고, 매대 주변을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표적이 작전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확실했다.
분침이 숫자 2를 가리켰다. 대위는 사인을 보냈다.
거의 동시에, 로비를 무너트릴 기세로 격발음이 울렸다.
“―――!”
그때였다.
큰 쪽이 작은 쪽의 몸을 끌어안고 후두부를 관통당한 몸으로 바닥을 굴렀다. 갈라진 두개골에서 붉은 뇌가 쏟아졌다. 짙은 혈액 덩어리가 대리석 바닥을 메웠다. 전부 한 사람의 몸에서 쏟아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 쏟아졌다.
“수배지에 적힌 인상착의가 맞나?”
“맞습니다. 추가 발포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제보자 연결해서 확인해.”
“이쪽 브라보, 본대 호출, 어, 잠깐, 표적 상태가 이상합니다. 분명 피격했는데…… 어, 어? 어어?”
피를 쏟아내던 표적의 몸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악을 쓰는 것 같다, 대위는 생각했다.
“발포해, 당장!”
기관 단총이 연발을 터뜨렸다. 표적은 작은 쪽을 안은 채 두개골을 꿰뚫리고도 한참을 더 버텼다.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단단해진 피부에서 기괴한 푸른빛이 돌았고, 턱 밑으로 뇌수를 흘리면서도 일어선 그는 품 안에 다른 표적을 안은 채 인간 아닌 것의 속도로 벽면을 질주했다.
표적의 활로에 포격이 쏟아졌다. 튀긴 피가 유리창을 덮고, 튕겨나온 탄피가 대리석 조각상의 뺨에 박히고, 성탄 장식을 더럽히는 내내 표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조준하는 대원들에게는 관심조차 없어보였다.
계속 굳어 있던 대위가 명령을 내렸다.
“레일건 가져와.”
하달 준비를 끝낸 대원이 눈을 크게 떴다.
“네? 하지만…”
“가져오라고. 저거 못 잡으면 우리 연말도 날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대위는 허리춤에서 레이저건을 빼들었다. 와장창, 송곳을 찔러 넣는 듯한 파열음과 레이저 격발음이 동시에 울렸고, 핏물로 엉망이 된 궤적을 그리던 표적이 유리 장식장 너머로 몸을 날렸다.
깨진 유리 조각 틈으로 표적의 발목이 덩그러니 남았다. 깔끔하게 절단된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이걸로 확실히 잡았다.’ 대위는 안도했다. 그것이 클리셰 SF 세계관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법칙 따위, 엑스트라에 불과한 그가 알 리 없었다.
조금 뒤 상황 종료 사인을 확인한 대원이 발목이 날아간 표적을 체포하러 백화점 서문을 나섰을 때.
기괴한 그림자가 대원의 시야를 한순간에 암흑으로 만들어 놓았다. 총알을 이길 수 있는 인간 따위가 세상에 있을 리 없는데. 대위는 군복 등판이 식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발목 하나로 안 된다면, 몸을 통째로 날리는 수밖에 없다고.
“레일건 준비했습니다.”
“장전, 장전하는 대로, 발포해!”
“하지만, 대위님, 이 뒤로는 거주 구역이……”
“다들 대피시켰다며?”
“단말 미이식자가 민가에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위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불손한 놈들은 우리 알 바 아니야. 죽어도 기록에 안 남을 놈들이라고.”
“…상부에는 어떻게 보고하면 되겠습니까?”
“상관 말고 저것부터 해결해. 네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꼴이 안 보이나?”
“죽이지 않았어! 기절만 시키고 있거든!”
어느새 품에서 빠져나온 붉은 머리 표적이 한 손에 테이저건을 들고 외쳤다. 최정예를 자청하곤 있으나 실상,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중앙 관리 체제의 붕괴로 그중 대다수가 겨우 몇 년 훈련했을 뿐인 사병 수준이다. 쓰러졌어야 마땅할 표적은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새 발목을 달고 가벼운 움직임으로 광장을 헤집어 놓는다.
‘저게 어떻게 인간이야?’
눈으로 추적하기도 어려운 속도로 날뛰는 두 표적과 차례차례 쓰러져가는 동료들의 모습에, 현장을 지키고 있던 대원 일동은 일제히 경악했다.
쿵.
그리고 포위 중이던 마지막 대원 하나까지 쓰러진 순간,
“이렇게 나약한 놈들이 최강은 무슨.”
안광이 돌아온 푸른 눈이 소름 끼치게 웃었다.
특수 군복도 아닌 검은 코트에 막힌 총탄이 흉한 소리를 내며 어그러졌다. 보다 경악스러운 건 그들이 만들어 놓은 난장판 안에 사망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진작 벌집이 되었어야 할 표적은, 어느새 정예 대원들 사이를 휘저으며 익숙한 솜씨로 급소를 찔러 기절시키고 있었다. 무장을 총동원해 달려드는 군인 수십을 맨손의 테러리스트 하나가 막아냈다. 그의 팔에 스친 대원들의 군복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대위는 잇몸을 떨며 아크로 동력원에 연결된 레일건을 확인했다. 동작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신호가 보였다. 이제는 더 따질 것도 없었다.
[SYSTEM: 민간 피해가 우려됩니다.]
경고창이 뜨는 것을 무시하고, 대위가 다급하게 발포 버튼을 눌렀다.
[SYSTEM: 발포 명령, 승인.]
그 모습을 포착한 작은 쪽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외치는 순간, 큰 쪽의 눈이 뒤집혔다.
대위는 눈을 의심했다.
전직 테러리스트라던 표적은 주포를 피하기는커녕 발사대 정면으로 몸을 날려 도약했다. 표적의 무게에 붙들린 발사대가 비틀리며 경로를 꺾었다. 거주 지구를 향했던 레일건 끝에서 섬광이 터졌다. 빗겨나간 섬광은 표적의 몸 절반과, 경로 끝에 있던 산 하나를 함께 날려버렸다.
쾅!
중심이 뚫린 산에서 굉음이 울렸다. 산사태의 전조였다.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훈련 중에 이런 건 없었는데’, ‘저런 괴물들을 상대하라는 설명도 없었고’, ‘자연재해는 전부 중앙 관리 체제에서 제어하고 있었다고!’ 우왕좌왕하는 대원들 틈에서, 곤죽이 된 표적이 상반신만 남은 몸을 굴리는 게 보였다.
그를 발견하고 달려간 작은 쪽이 그의 앞에 무릎꿇었다. 그가 외치는 소리는 대위에게 들리지 않았다.
“가서…… 이삿, 짐부터, 챙겨……….”
표적은 기어드는 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알았어.”
비도 눈도 아니었던 날씨는 어느새 진눈깨비가 되어 있다. 적설이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진영이 무너진 틈을 작은 쪽, 붉은 머리 소년이 내달렸다. 상반신만 남은 시체를 업고 숨을 몰아쉬는 소년을 군인 세 명이 둘러쌌다.
“정부의 명령입니다. 당신들은 현 시점부로 신병이 확보되었으며, 안전지대의 복리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항변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비켜.”
“무장을 해제하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십시오.”
“…….”
소년은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테이저건인 척 쥐고 있던 품에서 기관 단총이 터져나갔다. 길을 막고 있던 얼굴 세 개가 동시에 펑, 펑, 펑… 날아갔고, 소년의 붉은 머리카락이 핏물에 젖어 흩날렸다.
‘분명 기절만 시킨다고 했잖아.’ 현장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반동으로 밀려난 소년이 파트너를 들쳐 멘 자세로 외쳤다.
“못 들었어? 비키라고. 너희까지 저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공교롭게도 대위를 포함해 한때 수정공이라 불렸던 독재자의 외형을 기억하는 이들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붉은 머리 표적의 정체가 실종된 구 체제의 관리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추격에 나선 그들은 소년의 붉은 눈이 주던 위압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막 사람 셋을 죽인 소년의 눈동자에는 사람을 해쳤다는 죄책감이나 민간인스러운 망설임 같은 것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필사적일 정도의 분노와 광기만이 담겨 있다. 목이 날아간 동료들의 시체를 멀거니 바라보던 대원들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쳤다.
“뭐해, 막아!”
대위가 공허하게 외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눈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잿빛으로 가득한 눈밭에 시체에서 떨어져나온 갈빗대가 끌리며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소년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달렸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있으면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달아나야 했다. 형체를 알기 어렵게 된 시체와 키의 절반만한 기관 단총을 이고, 십 키로가 넘게 떨어진 도시 변두리의 집까지. 위태롭게, 위태롭게.
10.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문제가 된 거더라?
피범벅이 된 그를 업고 집까지 돌아온 건 좋았다. 그의 하체가 재생되는 동안 나는 정신없이 현관의 혈흔을 지웠고, 신발장 구석에 두었던 마취제와 상비약을 동원해 그의 상태를 간호했다. 그가 피거품 끓는 소리를 낼 때마다 내 뺨은 뜨겁고 축축하게 달아올랐으며 이를 덜덜 떨다가 잘못 씹은 혓바닥에서는 끔찍하게 비린 피맛이 났다.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내 기억은 불완전했고, 눈을 뜬 그는 폭주했다.
현관에 놓여 있던 액자들은 순식간에 벽에 부딪혀 조각이 났다. 원래도 잘 닫히지 않던 문짝은 완전히 찌그러져 불쾌한 쇳소리를 냈다. 외부와 연락을 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나는 자력으로 그의 상태를 확인하려다 날아든 발길질에 배를 맞고 엎어지고 말았다.
파트너에게 소생과 폭주라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건 동거 첫 해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상시에도 입버릇처럼 이 때를 경고하곤 했었는데, ‘내가 폭주하면 어떤 수를 써서든 날 죽여야 한다’ …그런 당부를 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권총을 보관해둔 선반은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멀었고 휘두르거나 던질 만한 물건은 전부 그의 난동에 부서진 뒤였다. 이성을 잃고 달려든 그가 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충격으로 기침이 터졌다. 그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내가 넘어진 바닥 옆의 마루를 부숴놓았다. 몸을 흔들어도 미동조차 않는 그의 무게는 아연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무릎을 세워 버둥거렸다. 그러자 목을 붙든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눈앞이 까무룩 도는 것 같았다.
아마도 과거의 나라면 파트너가 폭주했을 시의 행동지침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기억 외에는 어떤 정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기초적인 대인 전술이나 그와의 입씨름에서 이기는 법, 시끄럽게 코 고는 파트너를 조용하게 만드는 발차기 기술 정도만을 기억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같이 도움이 안 되는 것들뿐이었다!
“이거 놔, 이 멍청아……!”
이제 그는 손에 집히는 것들을 모조리 부숴대기 시작했다. 그가 내던진 플라스틱 의자가 옷장에 부딪혀 두 동강이 났다. 거실 중앙에 두었던 탁자가 벽 끝까지 밀려났고, 나는 그의 체중에 배가 짓눌리는 것을 느끼며 욱신거리는 목을 쥐었다. 동공이 풀린 푸른 눈이 이쪽을 보는 순간 섬칫 소름이 돋았다. 대화는 통하지 않을 듯했다. 내 목을 틀어쥔 그의 손에 점차 힘이 실렸다.
“…….”
“아… 커헉, 끅. 살려줘, 메테오…….”
이상하게도 목의 아픔이나, 죽음을 앞둔 불안한 마음보다는 안광을 잃은 그의 눈이 이쪽을 봐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훨씬 아프게 느껴졌다. 충격으로 감각을 수용하는 회로가 고장난 모양이었다.
확실히 밝혀두자면 나에게 그를 죽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방주에 남겨진 데이터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에는 짧은 충격으로도 사망에 이를 수 있을 급소가 무척이나 많았다. 그중에는 지금과 같이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노릴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어쩐지 그를 죽이는 법을 떠올리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 기분이었다. 순간 영화 속 플래시백처럼 그가 내 앞에서 핏물을 토하고 쓰러지는 장면 수백 개가 겹쳐졌다. 그것들은 하나도 동일한 게 없으면서 하나같이 사실적이어서, 그게 언젠가의 우리에게 정말로 있었던 일은 아닐까, 가슴이 미친듯이 뛰었다.
그가 죽은 적이 있었을까. 그것도 내 손에? 항상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고, 식사 시간이 아니면 투덜거리기만 하고, 번번이 안 된다는 트집만 잡아대는 무뚝뚝한 파트너가?
…그럴 리가 없다.
아니, 그런 적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그를 죽이고 싶지 않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의 진위 여부는 둘째 치고, 그가 고장난 태엽인형처럼 고꾸라져 쓰러지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백화점에서도 나를 보호한다고 이런 꼴이 되어버렸을 만큼 그는 바보 같을 정도로 이타적이며 희생적인 인간이란 말이다. 간혹 말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대화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둔감하고, 가끔은 답답한 구석이 있고, 고집도 세고, 그러면서도 선량하고 다정한 파트너가, 나는 언제나…….
눈물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가 뺨을 마구 타고 흘렀다. 올려다본 그의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바보, 이거 놓으란 말이야. 힘없이 외치며 가슴을 밀어냈으나 그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강한 현기증이 일었다. 시야가 흐려지며 눈앞이 핑 도는 것 같더니, 그의 손아귀에 감긴 머플러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벌어졌다.
아주 어릴 적 들어보았던 자장가 같은 것, 노래보다는 주문이나 시에 가깝게 울리는 것.
몸을 감싸 안는 따스한 푸른빛과 시원한 냄새.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부를 수 있었다.
11.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12.
깊게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꿈을 꿀 만큼 깊은 잠이었는데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밝아진 시야에서 가장 먼저 새빨간 눈동자가 보였다. 녀석의 눈은 더이상 붉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이건 줄곧 꾸고 있었던 꿈의 연장인지도 몰랐다. 나는 재차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시야가 완전히 돌아오고 나면 눈앞의 그라하 티아가 연기처럼 흩어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녀석이 등장하는 꿈의 끝에서 줄곧 그랬듯이.
“…….”
닿을 듯이 숙여진 목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목덜미는 더듬어도 뭉개지지 않았다. 손자국이 남은 자리를 만지자 녀석은 몸을 덜덜 떨다가, 사냥당한 사슴처럼 두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이 축축한 게 울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힘주어 끌어당기면 짭짤한 맛이 나는 콧등과 입술이 혀끝에 닿았다.
이 머저리는 키스할 땐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도 몰라서, 혀를 섞는 내내 눈꺼풀 너머로 움직이는 속눈썹의 물기가 느껴졌다. 누구 것인지 모를 핏물이 침에 섞여 혓바닥에 엉켰다. 그 미묘한 감칠맛에 우리는 기침과 웃음을 동시에 뱉어냈다.
“…버섯 맛 아니잖아.”
녀석이 불평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무드를 모르는 놈….”
나는 따라서 불평했다.
귀를 잡고, 그러다가 다시 정수리를 잡고, 뜯어 먹을 것처럼 입술을 물기도 하고, 피맛이 나는 혀를 길게 빨아들이며 바닥을 구른다. 몇 년 만에 나누는 키스에서는 혈액으로 절여낸 독버섯 같은 맛이 났다. 밭게 호흡하는 그라하의 상기된 콧등을 핥고, 다시 뺨에 입을 맞추고, 목을 끌어안아 정수리를 묻어도 녀석은 흩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신기해서 계속 웃음이 났다.
입술을 떼어내자 녀석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설명을 원한다는 눈치였다. 젖은 뺨에서는 여전히 붉은 빛이 돌았고 부푼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피고름이 앉은 수염을 닦아내고 짐부터 싸자고 했다. 그러자 녀석은 무척이나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무드도 모르는 바보.” 한다. 지쳐 드러누운 좁은 방 안에는 핏물과 소독약 냄새, 부서진 문 틈으로 들이치는 눈 냄새가 섞여서 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스름이 도는 이른 새벽이었다. 아무데나 던져두었던 싸구려 통신기(요즘 세상에 분리형 통신 단말을 쓰는 이들은 드물었지만 우리는 사정상 그 드문 이들에 속했다)가 징징 울리며 성탄절의 새벽을 알렸다.
소파까지 가지도 못하고 뻗은 탓에 바로 옆에서 그라하의 조용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고 침묵하는 녀석을 안아 침대로 옮겼다. 시트에 미처 닦아내지 못한 핏자국이 묻어 붉게 물들었다.
앞머리가 엉킨 이마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면 녀석은 잠이 좀 깼는지 가늘게 눈을 떴다. 어두운 침실, 이불 속에서 녹색 홍채가 말간 빛을 냈다.
그 녹색은 나에게 언제나 생을 의미했다. 청록으로 움트는 봄의 새싹, 이파리를 가득 매달고 가지를 늘어트린 상수리나무, 겨울이 올 것을 알고도 흐드러지는 이름 모를 풀꽃과 열매… 무너지기 이전의 세계를 의미하는 삶의 미장센 같은 것들. 그 안에 들어찬 생을 향한 의지를 보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것으로 흘러넘치는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멸망해버린 세상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일을 말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삶은 늘 우리에게 냉담했다. 고비를 넘기고 안심하는 순간 뒤통수를 갈기듯 새로운 절망을 던져 놓았다. 난관에서 난관으로 이어지는, 지겹도록 뻔한 전개의 반복이 싫어서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그럼에도 녀석의 눈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그놈의 진부한 전개에 열광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듯한 기분이 된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그 위에 군림하고. 역병과 미신이 돌아 세상이 열 번쯤 망하고 다시 세워진 뒤에도 인간은 어둠 속에서 이 녹색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아이를, 안개 속의 불빛을, 눈을 녹이는 신록을 발견하고야 만다. 그것들을 보면서 가슴 뛰는 감정을 반복하고, 울리는 고동 소리를 들으며 숨가쁘게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 녹색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아마도 그것이 중절모 외계인과 그라하가 말한 클리셰의 미학인 듯했다. 나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연말이면 상록수를 찾고 거리마다 화환과 겨우살이를 장식하듯이, 세상은 언제나 잿빛 속에서 피어나는 녹색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라하 티아는 언제까지나 나의 녹색일 것이며, 이 빌어먹을 크리스마스 역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13.
어떻게 하고 싶어? 이젠 다 알게 됐잖아.
전부 알게 된 건 아냐. 아직도 대부분의 기억은 네 인상처럼 흐리멍덩한걸….
완전히 돌아왔군, 망할 놈.
아니라니까!
…거주지가 들켰으니, 더 먼 곳으로 떠나야겠지. 집도 새로 마련해야 할 거고. 지금보다 훨씬 좁은 방에서 붙어 자게 될 수도 있어. 언제든 위험해질 건 뻔해. 그런 생활을 너한테까지 강요하고 싶진 않다. 싫으면 떠나도 돼.
됐거든,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
나는 너와 함께하고 싶어. 이전까지 우리가 어떤 생활을 해 왔고,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그런 것도 물론 여전히 궁금하지만. 조만간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
그러니 지금은 그냥, 네가 가는 곳에 같이 가고 싶다는 거야.
…….
썩어빠진 임시정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도 줘야 되고. 맞지?
……그래, 맞다.
좋았어, 그럼 결정이군. 짐 챙기러 가자!
14.
탕!
검은색 의자에 앉아 있던 마지막 사람이 뒤로 넘어가며, 회의실 내부는 혈향과 살덩어리로 채워졌습니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미간을 좁히며 밖으로 나간다면…
“짠, 눈썹이 웃기게 휘어진 파트너와 마주칩니다!”
“…그쪽은 끝났나?”
“물론이지. 열심히 나레이션 중인데 진지한 얼굴 하지 마.”
가볍게 웃은 나는 총구를 조끼에 문질러 닦았다. 이건 그에게서 배운 습관 비슷한 거였는데, 멋있어 보여서 따라하기 시작했다고 하자 그가 눈썹을 한 번 더 꿈틀거렸다.
그는 출발하기 전부터 실탄을 쓰는 데 거부감을 지닌 것처럼 꿈지럭거렸다. 답지 않게 주저하는 모습에 이유를 묻자, 그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정의’에 부합하기 어려울 거라 대답했다. 두 시간이 넘는 실랑이 끝에 우리는 결국 테이저 건으로 제압만 하기로 타협을 봤다. 그것만으로도 위협은 충분할 거다, 담백하게 말하는 그의 어깨에 기대 꼬리를 감았다.
그가 말하는 정의라는 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아무래도 그건 그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종 전반에 걸친 문제인 듯했다. 정의와 이상, 희망이나 소망, 믿음이나 사랑 같이, 인간 사회가 선망하는 가치들은 대부분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았고 방주의 지식을 빌리거나 단기간에 이해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서관에 기록된 서적들은 저자마다 제각각의 방식으로 정의를 정의하고 있어서, 나는 누구의 것이 정답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중 가장 저명한 학자의 것이 정답이라면 가장 저명한 학자는 누구인지, 또 가장 저명한 학자가 기원 전 인물인 경우 그는 뉴스에서 연일 떠들어 대는 <미싱 안드로이드 신드롬>이나 <생체 단말 이식 강제법>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나에게는 운 좋게도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파트너가 있었으므로, 언젠가 나는 식사 중인 그에게 대체 정의란 무엇이냐고 물은 적도 있다. 그때 그는 뭐 그런 어려운 걸 다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한참을 침묵하다가, 몇 분 뒤 밥풀이 잔뜩 묻은 입으로 ‘고민해 볼게’ 했다. 명쾌한 대답은 아니었으나 파트너의 지능 수치가 그리 높지 않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던 사항이다. 행복해 보이는 고동색 정수리를 위해 식사 시간을 더 방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먹을 때는 곰도 안 건드린다, 세간에는 그런 말도 있다고 하니까.
그게 벌써 두 달 전 일인가. 기절한 총리의 손목에 시간제 전자 수갑을 채워 놓으며 나는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정의가 뭔지는 고민해 봤어?”
그러자 그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불안한데.
“……그래. 알아낸 것 같다.”
“어디 들어보실까.”
“여기서 답하기에는… 여백이 부족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완강기가 설치된 유리창을 발로 깨 부쉈다. 쨍그랑, 큰 소리가 나며 그가 자신의 허리에 와이어를 연결한다.
나는 웃고 말았다. 하여간 클리셰 정말 좋아한다니까.
밤은 끝나가고 있었다. 깨진 유리창 밖으로 희붐하게 새벽이 밝는다. 그의 어깨에 안기면 익숙하고 시원한 냄새가 났다. 따스한 청광이 도시 곳곳 늘어선 마천루에 빛나고 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기울였다. 낙하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깨닫는다. 나아가기도 전에 다다를 목적지를 이해하는 빛줄기처럼, 이 앞에 기다리는 것이 정의나 소망, 믿음과 사랑이라는 추상의 이상향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문제의 답을 찾아 헤매는 것. 발자국 없는 길에 여로를 만들어가는 것. 역행하는 물살에도 멈추지 않고 헤엄치는 것. 그 끝에서 마주치는 이별이나 아쉬움까지도 사랑하려는 것. 그것이 세상에 단 둘 남은,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괴물들에게 내려진 최후의 지령이자, 최강의 발버둥일 테니까.
STEREO DIVE FOUNDATION - ALPHA
0. 진상?
표독스럽게 지식을 탐하던 그 미고는, 마지막 순간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에필로그가 알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변덕쟁이 미고가 마음에 들었던 한 관객은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했어요. 관객은 클리셰 SF 세계관을 무척이나 좋아했거든요!
하지만 주연 배우들은 이미 무대를 떠나버린 뒤입니다. 더 이상 출연을 원치 않는 둘을 위해, 관객이 만들어낸 세계는 평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클리셰 Sci-Fan-Fiction 세계관, 그러니까 <클리셰 SFF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은 진실도 거짓도 될 수 없으니까요. 무대 뒤에서 그들에게 일어났거나 훗날 일어날지도 모르는 아주 희미한 가능성 중 하나에 머물 뿐, 정답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진실은 저 너머에…’라며 마무리되는 열린 결말. 그것은 고루한 클리셰이긴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진실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클리셰 SF 세계관에서는 그 수많은 선택지를,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신의 권능, <최강의 클리셰>에게 바쳤던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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