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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의 경우

BUNDLE 2021. 11. 26. 05:46

연속재생을 권장합니다.

 

이 글은 청서(@Team_Laputa)의 CoC 7th [클리셰 SF 세계관의 크리쳐는 그어그어하고 울지 않는다] 월드세팅을 차용했습니다.

 

 

 

  1.

  안전지대의 한복판, 대형 스크린을 타고 울리던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전광판이 기분 나쁘게 파직거렸다.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냥 내 감이었는데, 화면을 더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걸 계속 보고 있었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끔찍하고 위험한 일이 발생하고 말 거라고! 누군가 귀에 대고 외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왜 그래?

  —아니, 방금 전광판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서… 넌 못 들었나?

 

  그라하는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웃었다. 이제 곧 연말이잖아. 광고는 시끄러울수록 이목을 끌고, 보통은 이목을 끄는 게 광고의 목적이니까… 이것도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발걸음을 떼는 녀석의 뒷모습에서 붉은 꼬리가 팔락였다.

  사실 내 감은 꽤 잘 맞는 편이라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불길함이 완전히 가시는 건 아니었다. 이브의 도심, 행인이 오가는 가운데 불 꺼진 화면은 이유를 불문하고 기이했다. 새카만 화면을 노려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그라하가 팔을 잡아당겼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자세가 되어 목 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일 년 전에 비하면 부쩍 가까워진 거리감이었다.

 

  —넌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자. 늦으면 세일 코너가 문 닫는댔어.

  —아직 점심 시간도 안 됐거든….

 

  밥부터 먹고 가자, 투정하는 내게 녀석은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빵 봉지를 품에 밀어넣었다.

 

  —이게 뭔데?

  —레토르트 파스타. 오늘 점심은 그걸로 때울 거야. 저녁은 비싼 곳에서 외식하기로 했잖아.

 

  그러니 돈을 아껴야 한다, 안 그러면 보일러 때울 돈이 없다고 또 네가 잔소리할 거다, 으름장을 놓는 녀석에게 나는 끝내 이기지 못했다. 눈을 흘겼는데 녀석은 보지 못한 듯했다. 무엇보다 그게 맞는 말이기도 했고.

  이브의 도심을 수놓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싸구려 파스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그나마 좋아하던 빵집의 메뉴였기에 얌전히 먹어주기로 했다. 식은 파스타는 한 덩이로 불어나 면보다는 빵에 가까웠다. 그래도 입에 넣고 씹으면 먹을 만한 맛이 났고, 녀석과 그런 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너 여기 다 묻었다.

 

  입가에 덕지덕지 묻은 붉은 소스를 닦아주고 소스가 묻은 손바닥을 자연스럽게 핥아 먹었더니 그라하는 새빨간 얼굴이 되어 기겁했다. 다물지 못하고 벌어지는 입모양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휴지를 쓰지 왜 더럽게, 외치는 입에는 포크를 물려 다물게 했다.

 

 

 

  2.

  식사를 마치고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선물로 이것저것 사 주겠다 장담을 해 놓은 터라 녀석이 저토록 들떠 있는 것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그동안은 추격이 어떻고 생활비가 어떻다, 하느라 제대로 된 선물을 줄 기회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

  1층의 세일 코너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나온 연인과 가족들로 대성황이었다.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말이 정확했다.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이리저리 치이고 밀렸다. 그러나 인파 속에서도 그라하 티아는 내 하나뿐인 파트너이자 최강의 크리쳐답게 날랜 동작으로 달려가 빨간 캐시미어 머플러 하나를 채 왔고, 이번에는 정말 네 선물로 사 줄 수 있다며 잇몸이 보이도록 웃었다. 가격 태그에 붙어 있던 바코드를 찍었을 땐 우리 둘 다 (그게 세일로 할인된 가격이라는 사실에) 기겁했지만, 녀석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비장한 표정으로 현금이 든 봉투를 점원에게 내밀었다.

  계산을 마친 뒤 우리는 그 난리통에서 겨우 벗어났다. 정전기로 엉망이 된 코트를 다듬으며 숨을 돌리고 있으면 그라하의 팔꿈치가 내 허리를 쿡 찔러왔다.

 

  —잠깐 숙여봐.

 

  어느샌가 포장을 뜯은 녀석의 손에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녀석에게 눈높이가 맞도록 했다. 보람차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그라하는 내 목에 머플러를 둘러 주었다. 턱의 절반을 덮어버린 면의 느낌이 포슬포슬했다.

 

  —헤헤, 잘 어울리네.

 

  여전한 얼굴로 그라하가 웃었다. 입꼬리가 쭉 말려올라가 눕힌 듯한 3자를 만들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앞니가 가지런했다. 철 모르는 아이처럼 쾌활하고 천진난만한 웃음. 그 앳된 웃음이 좋았다. 녀석과 처음 만났던 날을 포함해 하루도 빠짐없이 좋아했던 웃음이었다. 추운 날에는 홍조가 보이기도 했고, 달리는 동안에는 벌어진 입 사이로 흩어지는 하얀 숨결이 좋았다.

  어쩌면 그게 좋아서 여기까지 온 걸지도 모르지.

  귓바퀴가 화끈거려 무심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게 웃는 녀석을 지키고 싶었다. 가끔은 다투고 고집을 부리고 언성을 높이고 속을 박박 긁어 놓기는 해도, 그라하 티아가 저렇게 웃을 때면 나는 그 곁에서 말 못하는 머저리처럼 마냥 서 있고 싶었다. 한 뼘이 조금 넘게 낮은 어깨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으면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온대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AOC가 집앞까지 찾아오든 크리쳐가 수백 마리씩 밀려들든 내일 당장 세상이 무너진다 하든……. 그렇게 웃는 파트너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 대가로 하나 남은 목숨을 모조리 녀석에게 걸어야 한대도 상관없었다.

 

 

 

  3.

  돌아오는 길목은 여전히 인파로 가득했다. 번화가를 벗어나는 골목을 돌자 그나마 한적한 뒷길이 드러났다. 작은 술가게와 카페가 늘어선 거리에는 인형뽑기 기계들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고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인형더미 속에서 스웨터를 입은 곰인형 하나가 눈에 띄었다. 미간이 넓고 눈썹이 굵어 멍청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쩐지 누굴 닮았는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라하는 그 인형을 보자마자 기계 앞에 달라붙어서는 가지고 있던 동전을 전부 털어넣기 시작했다. 저놈 저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이 뻔했다.

 

  ―안 가나?

 

  내가 험악하게 묻자 그라하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조금만 있어봐. 조이스틱을 쥔 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기계를 조작했다. 기잉, 기잉, 하며 쇳소리가 울리고, 내려앉은 기계팔이 한끗 차이로 인형을 놓쳤다. 짜증스레 혀를 찬 녀석은 내 주머니에서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꼭 맡겨두기라도 했다는 듯이) 지갑을 꺼내 갔다. 그 안에서 동전이란 동전은 전부 털어내더니, 코인을 충전한 기계의 조작 패널에 OK라는 문자가 떠오르자마자 그라하는 다시 양손을 꿈지럭거렸다. 그리고 가지런한 손가락을 헬기 조작 훈련 때나 보이던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결국에는 삼십 센치짜리 멍청하게 생긴 곰인형을 뽑아내고야 마는 거였다.

  헉!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지른 녀석이 배출구에서 인형을 집어들었다. 먼지 쌓인 스웨터를 입은 곰인형이 녀석의 품 안에 꼭 안겼다. 애 취급 하지 말라 해 놓고, 이럴 때면 녀석은 누구보다 아이처럼 굴었다.

 

  —이거 너 닮았다! 이름은 메테오로 지어야겠어.

  —그럼 넌 저기 지나가는 도둑고양이 닮았다. 이름은 라하로 해야지.

  —너, 너 또…… 이거 인종차별이야!

 

  그렇게 치면 네 말은 인신공격이거든. 한 번만 더 그러면 정말 집에 곰을 들이겠다 씩씩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걸었다. 귀여운 곰돌이에 빗댔을 뿐인데 뭐가 문제냐며 그라하는 한참을 더 투덜거렸다. 실은 곰스럽게 한없이 누그러진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데, 설명해봤자 녀석은 ‘바로 그런 인상이 너와 닮았다’ 따위의 소리나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걷다 보면 광장 중앙에 커다란 트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루미네이션이 가득 감긴 트리에서는 눈부시다 못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빛이 났다. 지나가는 연인들이 하나둘씩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 게 보였다. 우리도 한 장 찍을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홀린 듯이 내뱉었다. 그 말에 그라하가 놀란 눈을 했다. 줄곧 보안을 끔찍하게 강조해 온 내 쪽에서 먼저 사진을 찍자고 해버려서일까. 생각해보면 함께 사는 내내 사진을 찍은 건 몇 장 안 되었던 것도 같다.

  거기 우두커니 서 있었더니 사람들이 뒤로 늘어섰다. 우리가 줄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뒤로 대여섯 쌍의 커플과 가족이 늘어서서, 나는 녀석과 난감하게 눈빛을 교환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한 장 찍어줄게!

 

  활짝 웃은 그라하가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녀석의 팔뚝에 어깨가 붙들려 몸이 돌아갔다. 하나 둘 셋, 하는 명랑한 외침에 나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뒷줄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거나 말거나 그라하는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 댔다. 이 정도로 사진 찍기 좋아하는 녀석이 여지껏 잘도 참았다 싶었다.

  몇 분이고 이어지던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광장 한 구석의 벤치에 앉아 함께 찍은 사진을 구경했다. 갤러리에는 서른 장 가까이가 찍혀 있었다. 한 장씩 넘겨 보는데 주변이 죄다 흔들려서 건질 만한 건 세 장도 안 됐다. 그나마도 그중 한 장은 내가 눈을 감았고, 다음 한 장은 카메라 렌즈에 눈이 묻어 화면 구석이 번져 있었다. 녀석은 그 세 장을 번갈아 보더니 너 이거 눈 감았다, 하고 킥킥 웃었다. 사진을 잘 안 찍어서 그래. 내가 대꾸하자 앞으로는 자주 찍어줘야겠네,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다음 장은 멀쩡하게 잘 나왔네….

  —그러려고 여러 장을 찍는 거야. 한 장은 건질 수 있으니까.

 

  이건 뽑아서 간직하자. 화면을 뚫어져라 보던 녀석이 빙그레 웃었다. 이상하게 속이 울려 헛기침을 했더니 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그러자 화면을 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아무래도 파스타만 먹으면 배가 고프지. 슬슬 저녁 먹으러 갈까?

 

  마침 광장 맞은편의 시계탑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저편 철망 너머로 우뚝 선 AOC의 본사 건물이 보여야 했는데, 오늘은 눈이 와서인가 흐릿한 하늘에 가려 거기까진 보이지 않았다.

  저녁은 스테이크로 할 생각이었다. 꼭 크리스마스 이브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늘은 우리에게 기념할 만한 날―퇴사 1주년―이었고, 지난 일 년 어울리지도 않게 검소한 나날을 보냈으니 하루 정도는 사치를 부려도 되겠다는 계산이었다.

  예약은 시내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다는 레스토랑으로 잡았다. 그것도 무려 한 달이나 기다린 거였다. 이브의 인파를 뚫고 레스토랑까지 걸어간다는 건 미친 짓이다 싶어서 드라이브 기분이나 낼 겸 차까지 빌렸는데, 그게 더 멍청한 선택이었다는 걸 도로 한복판에 갇혀서야 알았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라하도 나도 AOC에 입사한 뒤로는 연말 없는 매년의 연속이었기에 이브의 교통체증을 제대로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 겸 퇴사 일주년이라며 호기롭게 차를 끌고 나온 결과가 이거였다. 라디오를 타고 흐르는 크리스마스 캐럴 뒤로 그냥 내려서 걸어가자, 그게 빠르겠다, 시끄럽게 쫑알거리는 그라하 티아의 목소리가 반주처럼 깔렸다. 그래도 가사 없는 캐럴과 녀석의 목소리가 나쁘지 않게 어울려서인가. 듣고 있기 싫지는 않았다.

  주말과 겹친 이브에는 차가 기어가듯 했다. 그러느라 예약했던 시간보다 삼십 분은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설마 예약이 취소된 건 아닐까 했는데 다행히도 오늘 디너 타임을 예약한 손님은 우리가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운이 좋았네. 꼬리를 휘젓는 그라하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코트를 벗었다.

  멋스럽게 빛나는 샹들리에와 레드 브릭의 외벽으로 꾸며진 실내에서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맛있는 냄새가 났다. 주방이 보이는 바 테이블로 안내받은 우리는 겉옷을 벗자마자 메뉴판부터 찾았다. 양손에 메뉴판을 쥐고 설명을 읽어내려가던 그라하는 스테이크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귀며 꼬리며 온몸의 털을 한껏 세운 채 기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단어였기에, 우리는 메뉴 중 가장 설명이 길고 고급스러우며 기름져 보이는 사진의 스테이크를 가격도 보지 않은 채 주문했다. 주문을 받아 적던 웨이터가 굽기 정도를 물었을 때 미처 그런 것까지는 고민하지 못했던 우리는 어물어물하다 미디엄이 잘 나간다는 웨이터의 추천에 따라 미디엄 웰던 하나와 미디엄 레어 하나를 시켰고, 와인은 어떻게 하시겠냐는 물음에 줄곧 편의점 맥주만 마셔왔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브랜드로 부탁합니다, 하고 말았다.

  웨이터가 돌아가자 에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뒤적이던 녀석이 턱을 괴고 물었다.

 

  —여기… 함바그 스테이크가 아니라 그냥 스테이크 가게네.

  —맞아. 그래도 이게 더 맛있을걸.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까는 좋아하는 것 같더니. 괜한 긴장이 일어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왜 함바그로 안 했어? 저번 달부터 먹고 싶다고 했잖아. 집 근처에 맛있는 곳도 있다며.

  —거긴 예약이 다 차 있었어. 비싸기도 하고.

  —거짓말. 여기가 훨씬 비싼 곳인 거 다 알거든?

 

   함바그도 좋아하면서…. 녀석은 샐러드 소스가 묻은 포크 끝으로 접시를 두드리며 말했다. 거슬리는 금속질의 소리에 신경이 긁힌 나는 녀석에게서 포크를 뺏어들었다.

 

  —그건 너무 뻔하잖아.

 

  이왕이면 이브에는 고급진 게 먹고 싶기도 했고. 포크에 묻어있던 소스를 핥자 낯선 맛이 났다.

  사실 함바그 스테이크는 연말이 아닌 연초에 먹고 싶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 해가 넘어가고, 녀석이 더는 스물 다섯이 아니게 되는 날에. 내가 어째서 함바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날에. 그건 그래야만 의미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르게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침묵이 이어졌다. 녀석은 내가 이번에도 이상한 고집을 부렸다고 생각했는지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데운 물로 공복을 달래고 있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이크가 서빙되어 나왔다. 나는 김이 오르는 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 안 가득 육즙이 퍼질 때쯤 그라하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뻔한 것도… 좋아하는데.

  ―알고 있어.

 

  모를 수가 없지 않나. 다들 진부하다고 욕하는 고전 영화며 소설이며, 시놉시스가 취향이라면 어떻게든 찾아보고 마는 녀석의 매니아 기질 앞에선 백기를 흔드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우리가 지내는 거실은 언제나 연체된 비디오와 표지에 도서관 도장이 찍힌 책들로 난장판이었다. 한번은 거실을 치우다 말고 비슷한 걸 이렇게나 많이 봤는데 용케도 안 질린다, 물은 적이 있었는데 녀석의 대답이 이랬다.

   네가 보기엔 전부 같은 내용인 것 같지.

  실은 그렇지도 않아.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각자 다른 역경을 매번 다른 방법과 이유로 극복한단 말이야. 그 과정이 처음에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어도… 보고 있으면 그게 어떤 녀석이든 응원하게 돼. 마지막에는 멋진 결말을 맞이하기를 바라게 되고, 슬픈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눈물이 날 때도 있지. 비슷해 보여도 감동을 주는 방법은 항상 달라져. 그 사소하지만 중요한 차이 때문에… 보는 사람은 매번 새롭게 이야기에 빠지고 반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이건 전부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열변을 토하며 책장을 넘기는 파트너를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한 가지에 몰입하면 다른 것들은 눈에 들이지도 않는다는 게 그라하 티아의 유별난 점이었다. 그건 지금처럼 식사 중일 때에도 해당하곤 해서, 스테이크에 푹 빠진 녀석의 입가에는 갈색 소스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다 묻는다니까.

 

  세팅되어 있던 냅킨을 꺼내 펼쳤다. 습관적으로 뺨에 묻은 것들을 닦아주려다 눈이 마주쳤다. 끝이 솟은 눈매가 붉게 휘어지더니 고맙다며 배시시 웃는다.

 

   …뭐야 이게?

 

  심장이 목젖까지 튀어오르는 기분에 곧장 물을 들이켰다. 난방이 고장이라도 났나, 실내가 이상하게 더웠고 삼킨 스테이크의 맛조차 모르게 될 만큼 혀 아래가 뜨거워졌다. 급하게 마신 물에 사레가 들려서 콜록이고 있었더니 녀석이 등을 두드려 왔다. 조금만 늦었어도 분명히 체했을 거였다.

 

 

 

  4.

  차창 위로 와이퍼가 딸깍이는 소리가 났다. 밤의 도로에 황백색 전조등이 깔리면 눈은 그 안에서만 내렸다.

  내일은 뭐 하지? 글쎄, 내일은 토요일에다 크리스마스니까 케이블에서 특선 영화가 하지 않을까. 조수석에 앉은 그라하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악셀을 밟았다. 뜨끈해진 뱃속과 열선을 데운 가죽 시트의 조합은 하루뿐인 사치라기엔 아쉬울 만큼 포근하고 달콤해서, 몇 시간 전엔 그렇게나 막히던 길이 지금은 훤히 뚫려버렸다는 게 내심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이상한 클리셰 영화 볼 거지?

  —아니, 나 홀로 집에 볼 건데.

  —그게 클리셰 영화잖아…….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운전대에 기대버렸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줄 알면서 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말이었다. 지난 일 년, 둘이 붙어앉아 영화를 보는 건 (그게 어떤 내용이든)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이제는 주말 저녁의 일과나 다름없게 된 지도 오래라 일요일 점심이면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간편식을 데워 먹으며 전날 보았던 영화 얘길 나누곤 했다. 주제는 대체로 ‘영화 속과 비슷한 상황에 빠지면 어떻게 할 거냐’에서 가끔 장르에 맞게 바뀌거나 했다. SF 재난 영화를 보고 난 다음날, 내가 소시민답게 목숨이 아까우니 도망치겠다 하면 그라하는 정의를 지켜야 할 주인공이자 전직 최강의 인류가 되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꼬리를 바싹 터뜨리는 식이었다. 한바탕 하고 난 뒤 이기는 쪽은 언제나 그라하였다.

  차체는 얼어붙은 도로 위를 빠르게 미끄러져 갔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빌딩의 불빛이 사그라들었고, 거리를 장식하던 크리스마스의 조명도 차츰 희미해졌다. 안전지대 변두리의 셋방까지는 국도를 따라 꽤 한참 가야 했는데, 어느 순간 차내가 고요하다 싶어 옆을 돌아보면 그라하가 잠들어 있었다. 자는 녀석을 깨우기엔 미안해서 그 대신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밤 열 시를 알리는 시보와 함께 조용한 재즈가 흘러나왔다. 자정을 두 시간 앞둔 이브의 밤. 집에 도착할 무렵까지도 그라하는 졸음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 있었다.

  늘어진 몸을 부축하며 집 안까지 옮겼다. 불 꺼진 현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너저분했다. 어질러진 신발들과 닫히다 만 신발장을 무시하고 우리는 거실로 향했다. 창 밖은 눈이 내리는지 새카맣게 고요했다. 녀석은 웬일인지 이르게 피곤하다는 소리를 했고, 사 온 맥주와 피자를 두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보일러를 높이고 잠옷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침실 창가에서 커텐이 덜걱거렸다. 외풍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러니 보일러를 최대로 틀어도 춥다는 말이 나오지. 무용하게 새어나갔을 전기세를 생각하며 다가갔더니 커텐 너머에서 기이한 빛깔의 하늘이 보였다.

  눈발조차 보이지 않는 새카만 하늘이었다. 성탄절 당일에 눈이 오려면 이브의 밤하늘은 고요하고 어두워야 한댔는데. 이곳에서 보이는 하늘의 암흑은 성탄전야의 설렘이 아닌 불쾌한 적막만을 퍼트리고 있었다. 이대로 세상 모든 빛을 삼키고 빨아들여서 다시는 내어 놓지 않을 듯했다.

  더 보지 못하고 커텐을 내려버렸다. 저 멀리 도심 방향으로 검고 거대한 구름이 내려앉거나 말거나…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미장센일 뿐이다. 애초부터 이건 그 어떤 클리셰와도 맞지 않는 이야기였으니까.

  뻔한 전개를 거부한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기적처럼 짧고 근사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하룻밤이었다. 분명 황홀하긴 했지. 하나부터 열까지 녀석과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었지만. 자기 침대를 두고 굳이 내 침대까지 와서 잠든 그라하의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웃음이 났다. 비져나온 꼬리 위로 이불을 덮은 다음 식어버린 맥주를 땄다. 첫 입을 마시자 언젠가 보았던 뻔한 재난 영화의 끄트머리에서 머리 희끗한 노장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지막 날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것. 그렇게 재밌게 본 영화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 말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커텐을 덮고 수면등을 켜면 난색의 불빛이 퍼진 방 안에서 따뜻한 겨울 냄새가 났다. 벽을 타고 보일러 끓는 소리가 울리고, 옆에서는 벌써부터 새근새근 숨소리가 흘렀다. 잠시 뒤 켜 두었던 라디오에서 음악이 끊어지더니 낭랑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대망의 크리스마스까지 십 분이 남았습니다!

 

  실은 알고 있었다. 매년 연말이 이 비슷한 흐름의 반복이라는 것.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은 하루를 세상 모두가 일 년 내내 손꼽아 기다리고, 그 전야가 주는 설렘만을 이상할 정도로 사랑하고 만다는 것.

  그리하여 온 세상이 수천 수백 년째 이 미친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도 정작 선물을 든 산타가 찾아온다거나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며 남는 것은 폭탄처럼 터져나오는 전기세와 실망을 닮은 허무감뿐이라는 사실을 다들 모르지 않을 텐데도, 크리쳐가 날뛰는 이런 세상에서도 날이 추워지면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명을 꺼내 거리를 장식하고 연말을 함께할 가족과 연인을 찾았다. 마치 그것이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객석에 앉아 넓은 스크린을 마주보는 순간에는 두근거려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것처럼. 캐럴을 듣는 순간 심장은 뛸 수밖에 없으며, 이야기의 끝에서 기다리는 아쉬움조차 결국에는 사랑하게 될 거라는 듯이.

  캔을 열어버린 맥주를 끝까지 비웠다. 품에 안은 그라하 티아가 따뜻해서인가, 베개에 머리를 대면 따라 졸음이 몰려왔다. 눈꺼풀은 빠르게 무거워졌고, 내일은 아주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온 세상이 이대로 자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澤野弘之 - Christmas Scene

https://youtu.be/EMomgbATgBE

   

bit.ly/in_case_of_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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