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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청서(@Team_Laputa)의 CoC 7th [클리셰 SF 세계관의 크리쳐는 그어그어하고 울지 않는다] 월드세팅을 차용했습니다.

 

 

  겨울옷을 꺼내야 할 때였다. 달력이 넘어가고 바람이 서늘해지자마자 그라하가 투정을 해 댔다. 메테오 나 추워. 우리 이러다 얼어죽겠어. 연초 폭탄처럼 터져나왔던 보일러 값을 생각하면 난방을 높이기보다 두툼한 옷을 사다 놓는 게 나을 것 같았는데, 되는대로 구한 셋방이었지만 근처에 백화점은 있었다. 알바를 나갔던 그라하가 백화점에서 겨울 맞이 세일을 한다는 전단지를 들고 왔다. 새 옷보다 뜨끈한 보일러 바닥이 더 좋다며 투덜거리는 녀석을 끌고 간만에 외출을 했다.

 

  ―백화점까지 오는 건 오랜만이네. 아마 지난 크리스마스가 마지막이었지?

 

  집과 일터를 반복하며 항상 비슷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느라(추적을 피하느라 눈에 띄는 차림새는 할 수도 없었다) 마지막 옷 쇼핑은 석 달 전 여름철이었다. 옷이 많아 봐야 이사할 때 번거로워질 뿐이다. 두 달에 한 번 꼴로 주소를 갈아치워야 하는 탈영병들에게 옷 쇼핑 같은 건 사치스럽기만 하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거기 불만이라도 있었는지, 세일 코너에 도착하자마자 그라하는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롱패딩과 숏패딩 중 어떤 게 낫겠냐 매대의 옷더미를 한참 쑤석거리던 녀석은 뜬금없이 목도리에 꽂혔고, 이건 고급 캐시미어라 가격대가 꽤 나간다는 점원의 설명에 꼬리를 툭 떨어트렸다.

 

  보고 있자니 속이 울컥했다.

 

  까짓 목도리 비싸 봐야 얼마나 한다고. 생명수당이 나오던 시절에는 고민 없이 긁었을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 게 답답했다. 낭비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식구가 하나 늘었을 뿐인데 일상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바뀌어 갔다. 장을 볼 때도 간식을 살 때도, 옷이나 잡동사니를 살 때도 항상 두 개씩. 식비와 난방비, 통신비도 교통비도 두 배씩. 늘어난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나는 일감을 세 배로 찾았고, 그라하는 그런 날 못마땅해 하면서도 말리지는 않았다. 마침 이틀 전은 월급날이었고, 내 지갑은 (평소에 비해) 두둑했고, 낡은 패딩과 보풀이 일어난 스웨터 차림의 그라하를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점원 앞에서 나는 당당히 현금을 꺼내들었다. 반색하는 표정이 볼 만했다.

  그렇게 그라하의 손에 검은색 캐시미어 목도리를 쥐여 주고, 조금 무리해서 세일 중이던 구스 다운 롱패딩까지 두 벌 사서 돌아왔다. 덕분에 받은 월급 절반이 날아갔지만 헤실헤실 웃고 있는 그라하 티아를 보는 건 예나 지금이나 즐거웠기에 상관없었다. 꼬리가 팔락거리는 게, 보일러 안 높여준다고 불평하던 놈은 어디 가고 신이 난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하루에 너무 많이 쓴 거 아냐?

  ―알바 더 늘리면 돼.

  ―지금도 알바 다닌다고 늦게 오면서…….

 

  그렇지 않아도 이틀 간격으로 야간 대리를 뛰고 있긴 했다. 일감이 많거나 진상이 걸려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면 녀석은 뜬 눈으로 새벽까지 나를 기다렸다. 눈꺼풀 가득 졸음에 절어서는 오늘도 수고했어, 비몽사몽하는 목소리가 매번 기특했다. 이렇게라도 기다리지 않으면 하루에 얼굴 볼 시간이 없잖아. 투정하는 소리에 못내 미안해졌다. 그래서 한번은 사설 보안업체나 공사장 용역, 하다 못해 데이트 아르바이트처럼 몸이 좀 고되어도 보수가 센 일을 해 보겠다 했는데, 그라하는 그런 일은 죽어도 안 된다며 길길이 난동을 부렸다. 그걸로 한 달만 죽어라 벌면 네 학비도 댈 수 있어, 내가 말했을 때 녀석은 차라리 자기가 AOC로 돌아가서 생명수당 타는 대신 한 번 죽고 오겠다 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했다. 그러면 그라하 티아는 코웃음을 치면서, 네가 한 말도 다를 바 없거든, 했다.

  우린 자주 싸우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번 일이 터지면 끝장을 봐야 했다. 특히 저녁 식탁에서 치고받을 때가 많았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피곤해진 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하루를 털어놓다 보면 저도 모르게 가시 돋힌 말이 나가곤 했다. 그라하는 내가 오락을 하거나 술을 먹고 들어오는 걸 특히 싫어했고, 나는 그라하가 주말 늦게까지 피시방에서 라면을 끓이는 꼴이 그렇게 싫었다. 일을 그만두니 마니, 추적이 새로 붙었니 어떻니, 말다툼을 하다 보면 주방부터 거실까지 엉망이 아닌 곳이 없었다. 둘 다 불이 붙으면 물러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더 그랬다. 보통은 최강의 크리쳐의 고집을 감당하지 못한 내 쪽에서 백기를 드는 걸로 마무리되었지만, 그날은 조금 특이했다.

  그날 저녁, 녀석은 사 온 지 세 시간도 안 된 목도리에 함바그 소스를 엎었다. 외식을 다섯 번은 할 수 있는 돈으로 큰맘 먹고 고급 목도리를 사 줬더니, 먹을 때는 내려 놓으라는 말에도 자긴 최강이라 민첩하니 괜찮다며 고집을 부리던 녀석이 기어코 매고 있던 목도리 위로 그릇을 엎었다. 내가 먹는 중엔 촐랑거리지 말랬지. 한숨을 쉬자 그라하가 이쪽 눈치를 보며 꼬리를 바짝 세웠다.

 

  ―이 정도는 드라이 맡기면 되거든!

 

  드라이가 누구 집 개 이름인 줄 아는지. 그라하는 쉽게도 목청을 높였다. 네 드라이 값 마련해야 하니 나는 당장 대리나 뛰러 나가보겠다 빈정거리자 녀석의 눈이 토끼처럼 발개졌다.

 

  ―너…… 진짜 못됐어.

 

  그러곤 쾅,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녀석이 식탁 의자를 밀치는 소리였다. 최강의 크리쳐에게 밀려난 의자는 식탁을 밀었고 밀려난 식탁은 다시 벽에 긴 자국을 냈다. 자국은 길고 흉하게 이어져 벽지를 새로 도배해야 할 판이었다. 우릴 미행하는 AOC 놈들이 있다면 벽이 울리는 것만 보고도 눈치를 채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무시무시한 굉음이었다.

  나는 나대로 화가 나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 벽지 수리하려면 얼마나 드는지 알아? 싫증을 내려던 그때 그라하의 눈가가 한층 발갛게 물들더니 눈물을 방울방울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말을 정리하면 대충 이랬다.

  그 목도리, 원래는 알바비가 들어오면 내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점원에게 가격을 듣고 그건 포기했고, 결국 내가 계산을 마치는 것까지 보고 선물할 마음은 접었다는 거였다. 대신 내가 준 선물이니 애지중지 아낄 생각이었는데, 간만의 쇼핑으로 들떠버린 나머지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단다. 말을 이어가는 내내 녀석은 억울한지 코 먹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조용해졌나 싶으면, 매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내 안면에 던졌다. 퍽.

 

  ―이 좀생이, 구두쇠, 짠돌이, 머저리!

 

  녀석이 머저리! 하고 외치는 순간 목도리는 정확히 내 콧등에 안착했다. 함바그 소스에서 레토르트 특유의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돈이 그렇게 부족하면 내가 더 벌면 되잖아.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화를 내는 건지 울먹이는 건지 모르겠는 소리로 그라하가 웅얼거렸다. 듣고 있자니 웃음이 터졌다. 나는 그냥, 한참 어린 네가 일터에 나가서 고생하는 게 싫었을 뿐인데. 자칫하면 표적이 될 수도 있고, 지금 같은 일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쫓겨 말이 곱게 나가질 못했다.

 

  ―네가 고생하는 게 싫단 말이야. 상부 눈에 띄었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난 최강이거든, 납치 같은 건 안 당해! 바보, 멍청이, 머저리!

 

  머저리 머저리 주고 받다 의자를 두 개 더 부술 뻔했다. 그러다 진이 다 빠질 때쯤 눈이 마주쳤고, 소파에 드러누워 우린 실성한 사람들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일 년 전만 해도 옷에 미트볼이 묻든 피가 튀기든, 하물며 크리쳐의 살점이 묻어나도 신경쓰지 않는 게 우리네 일상이었다. 먹고사는 게 다 뭐라고 이런 별것도 아닌 일로 다투게 됐을까. 민망해져서는 헛기침을 했다. 매번 궁색하게 돈 문제로 다투어야 하는 현실이 싫었고, 일 년 사이 최강의 인류에서 평범한 좀생이가 되어버린 나와 매일을 부대끼면서도 가출하지 않아 준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생각하면 우습기야 했다. 겨우 소스 좀 엎는 게 무슨 대수라고. 녀석은 도살장 안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나에게 자유를 주고, 목줄을 터뜨려 한 명의 인간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소중한 은인 겸 파트너 겸 동거인인 그라하 티아가 과거의 자신처럼 고생하지 않도록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은, 그럴 수 없는 현실과 번번이 부딪히며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평범한 보호자를 자처하기엔 한참 모자란 인간이었다. 녀석과 함께하는 일상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과, 이번 달 공과금이 적힌 고지서를 볼 때의 마음은 매번 상극을 이뤘다.

  그렇다고 녀석에게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런 빵점짜리 동거인이나 되려고 함께 도망치자고 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후회에 뒷목을 긁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라하, 내가 괜한 소리를 했다. 네 마음 알아. 선물은 꼭 비싼 게 아니어도 되니까, 언제든 고맙게 받을게. 사과하면서 붉은 정수리를 끌어안고 있으면 그라하는 이 바보가 이제 와서 낯간지럽게 왜 이러냐며 버둥거렸다. 품에서 요동치는 크리쳐 특유의 빠른 고동소리가 무안할 만큼 좋았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

 

  그러느라 목도리에 묻어 있던 소스가 녀석의 낡은 스웨터에 눌렸다.

  처음 보았던 날부터 입고 있었던, 보풀 가득한 회색 스웨터. 이제는 함바그 소스까지 묻어버려서는 드라이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꼴이 되어 있었다. 낮에 스웨터를 하나 더 사 올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가 일었지만 이미 월급 절반을 날린 뒤였다.

  그날 밤 우리는 러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트려 놓았던 침대를 다시 붙였다. 화해도 했겠다 오늘은 밤새 떠들다가 자고 싶다는 그라하의 고집이었다. 잠들기 전이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탈영 전 부대에서 있었던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녀석에겐 지난 일을 썩 재밌게 늘어놓는 재주가 있었고, 말재간이 없는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그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더 좋았다. 

 

  ―그때 아르봉트가 레미트더러 네가 여자였냐면서 기겁을 하는데…….

  ―아르봉트가 아니라 아르버트라니까.

  ―몰라! 그거나 그거나지 뭐. 아무튼 그렇게 기겁을 했는데 그때 중대장님이…….

 

  캄캄한 방 안에서 이불을 나란히 덮고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말소리는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가루눈에 어깨가 하얘지듯이. 앳된 목소리가 혼자서 작전지의 저 너머까지 달려나가는 걸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꺼풀이 감기고 잠이 밀려왔다. 침대 구석에 허물처럼 널브러진 그라하의 스웨터에서는 여전히 함바그 냄새가 났고, 나는 녀석과 둘이서 레토르트가 아닌 수제 함바그 스테이크를 써는 꿈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면 이불로 견디기엔 조금 싸늘해진 11월 초였다.

  내일은 일어나면 새 이불을 꺼내고, 아침을 먹고 보일러를 신청한 다음…… 다음 달 백화점 세일 날짜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선물할 새 스웨터나 고르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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