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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빛전, 외형은 자유롭게 상상해주세요.
1.
달이 뜨는 밤에 타워 고층까지 가 본 적 있니? 거긴 매년 수정제 기간을 제외하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출입이 금지된 곳인데, 밤만 되면 사람 목소리와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소리가 들린다고 해. 마치 유령이라도 사는 것처럼 말이야. 실은 저번 견학 시간에 타워 안에서 길을 잃었던 아킬과 리키 티오도 비슷한 말을 했었어. 지금은 잠겨 있다는 성견의 방 복도에서 꼭대기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봤다고. 어른들은 입버릇처럼 타워 꼭대기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나는 못 믿겠어. 거긴 수정공이 잠든 곳이잖아. 살아 계실 적 그분은 평범한 인간과는 달랐다고 하니까, 분명 죽지 않고 유령이 되어 타워 꼭대기에서 이 도시를 지켜보고 계실 거야. 그러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이 되면 어른들 모르게 옥상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오는 거지.
그래, 해가 지면 마법이 풀리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말이야. 올해 수정제에는 그분을 찾아가서 말할 거야. 나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밤마다 숨어다니지 않아도 괜찮다고. 수정공께서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면 다들 기뻐할 거라고.
세상을 구하고 은퇴를 선언한 지도 어언 십 년. 빛의 전사는 여전히 수정공의 꿈을 꾸었다. 꼭 나쁜 꿈만 꾸는 건 아니었으나 세어 보면 반반의 확률로 악몽에 가까웠다. 이제는 몸이 무겁고 뻐근한 날이면 악몽에 시달리겠거니 예상할 수 있었고, 수정공은 그런 예감이 드는 밤이면 다시 반반의 확률로 꿈 속에 찾아오곤 했다.
어젯밤 꿈은 이상하게 선명했다. 선명하다고는 해도 늘 그렇듯 세세한 상황이나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꿈 속의 인영이 그라하 티아로 돌아오기 전, 후드 아래 표정을 숨긴 수정공의 형체를 띠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꿈 속에서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빛의 전사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운 이를 부르듯 잔잔한 파형을 그리는 음성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선명해서 자꾸만 생각이 났다. 꿈은 무의식이 부려놓은 심술에 불과하다지만, 이번만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타워의 수정공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랑하고 다닐 만한 내용도 아니고 말짱히 살아 있는 그라하 본인에게 들킬까 싶어 어디 털어놓진 못했으나, 그의 얼굴에 드리운 조급함과 그리움을 간파한 산크레드는 너 한가하냐? 한가하면 이것 좀 저쪽에 전해 줘, 하며 달달한 초콜렛과 커피콩을 잔뜩 놓고 갔다.
집 앞에 놓인 디저트 꾸러미를 보며 빛의 전사는 시간의 흐름을 감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었는데, 이제는 초콜렛을 바깥에 놓아도 녹지 않는 계절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노르브란트에 간 게 언제였더라? 일 년 전? 대충 그 언저리였다는 기억만 있다. 폭탄 같았던 은퇴 선언 이후 빛의 전사는 영웅으로서의 과거와는 거리를 두겠다며 교외의 작은 주택을 점하고 칩거하듯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노르브란트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이번처럼 산크레드의 부탁을 받는다거나 하는 핑계로 용건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 세계를 자진해서 찾아가지는 않게 되었다. 그렇게 수 년이 흘렀다. 에오르제아의 사계가 한 바퀴를 도는 동안 그 세계에서는 몇 번의 계절이 흘러갔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곳과 이곳의 시간은 수정공이 일으킨 기적으로 단 한 번 교차한 뒤, 팽창하는 인과 속에서 다시 본래의 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었으니까.
다음 날부터 빛의 전사는 모험가 길드에 양해를 구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새벽의 영웅 역할을 그만두었을 뿐 모험가 일까지 팽개친 건 아니었으므로 그를 찾는 의뢰인은 여전히 많았다. 한번은 신대륙을 탐험한다고 에오르제아를 떠나 있었다가 길드장에게 업무가 마비될 뻔했다는 불평을 고막이 곪도록 들은 적도 있었다. 그 불평 속에 스며든 근심의 정체를 모르지 않기에, 이번에는 링크펄을 꺼내 옛 새벽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을 돌렸다. 나 며칠만 쉰다. 급해도 못 가, 정말 못 가니까 급한 일은 만들지 마. 대체 어딜 다녀올 셈이기에 그리 으름장을 놓느냐는 길드장의 성화에 빛의 전사는 들고 있던 링크펄을 뚝 내려놓았다. 노르브란트에 간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곳에 간다 하면 그라하 티아가 그곳을 떠올릴 테고,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그라하 티아가 짓는 후련한 듯 쓸쓸한 미소에 빛의 전사는 끝내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성견의 방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면 사람들은 어둠의 전사의 방문을 알아채고 반겼다. 여전한 모습의 라이나와 키가 한 뼘은 자란 린이 타워 바로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시간의 흐름이 크게 뒤지지는 않았으며 여기서도 십 년 언저리가 지났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원초세계에서 일 년이 지나는 동안 노르브란트에서는 수십 년이 흘렀을지 모른다는 위리앙제의 경고는 다행히 이번에도 빗나갔다.
매번 이렇게 나오지 않아도 돼. 다들 바쁘잖아? 반갑다는 속내를 에둘러 표현하며 빛의 전사는 웃었다. 린에게 산크레드의 근황과 디저트 꾸러미를, 라이나에게 그라하 티아의 안부를 전한 다음에는 크리스타리움을 한 바퀴 돌았다. 변하지 않은 곳보다 변해버린 곳이 더 많을 터인데도 이 도시는 언제나 고향처럼 정겨운 데가 있었다. 라하가 봤더라면 엄청나게 좋아했겠지. 내뱉지 못할 말을 목청 안으로 삼키고 라이나를 따라 걷는데, 우주의 화음 시장을 지나칠 무렵 그쪽에서 먼저 살가운 말을 붙여왔다.
“소식 들으셨나요?”
“무슨 소식?”
“올해로 수정제가 벌써 십 주년을 맞이했답니다. 참여 의사를 밝힌 주민들도 역대 최다 수준이에요. 분명 이 도시가 나날이 번성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두 분께 뒤지지 않게끔, 저희도 멈추거나 물러서는 일 없이 순항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어둠의 전사님께 보여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힘주어 말하는 라이나의 귀가 칭찬을 기다리는 꼬마아이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쩐지 며칠 전 본 것처럼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런 기시감을 선사한 장본인… 그러니까, 칭찬을 바랄 때마다 두 귀를 늘어트리는 버릇이 있는 그라하 티아가, 꼭 이런 모습을 하고 원초 세계의 동료들과 함께 자신의 귀환을 기다리는 모습이 저도 모르게 상상되었다.
혈연 없이도 유전되는 것이 있구나. 생각하며 빛의 전사는 흔들리는 두 귀를 따라 반역자의 도시를 일주했다. 그리고 물결에 부유하는 수초처럼 흔들흔들 걸은 끝에, 타워의 정문이 올려다보이는 장막 대문 앞에 도착했다.
“현황 보고는 이상입니다. 이 뒤로는… 그분을 만나러 가실 거죠? 항상 그러셨듯이요.”
지난 십 년 동안 몇 번인가 반복된 방문은 항상 같은 장소에서 끝을 맺었다. 매번 같은 수순으로 어둠의 전사를 맞이했던 라이나는 말끝에 미미한 확신마저 담고 있었다.
“그래. 왔으니까 얼굴 한 번은 보고 가야지.”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옥좌를 개방 중에 있습니다. 축제 준비 기간이거든요. 평시에는 보안상 이동장치를 막아 두고 있는데, 수정제를 빌어 그분과 대면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신병들에게도 어둠의 전사님의 출입은 막지 말라고 일러 두었고, 바로 가시겠다면 안내하겠습니다.”
빛의 전사는 알 만하다는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가도 괜찮은데.”
“그래도 문 앞까지만 배웅하게 해 주세요.”
문 앞까지가 어느새 계단 앞까지가 되고, 계단 앞까지가 어느새 옥좌 앞까지가 된다는 것을 빛의 전사는 숱한 경험 속에서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황제의 옥좌가 갖는 의의는 교과서 속 위인이 실재하였다는 증거 정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었으나, 남겨진 몇몇 이들에게 그곳은 여전히 상실을 의미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원체 밝고 씩씩하였던 수정공의 손녀라면 그 기억을 마주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을지 몰라도, 빛의 전사는 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평정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마음만 받을게. 오늘은 정말로 못 볼 꼴을 보일 것 같거든.”
“뜻밖이네요. 어둠의 전사님께도 그런 모습이 있었던가요.”
라이나는 턱을 쥔 채 빛의 전사를 흘겨보았다. 불신이 깃든 몸짓이었다.
“글쎄, 여기까지 오는 건 오랜만이거든… 정말 울어버리면 부끄러울 것 같아서 그래.”
완곡하게, 그러나 말미에는 분명하게 거절의 의미를 담았다. 그러자 빛의 전사의 어깨에 머물러 있던 라이나의 시선은 날렵함을 잃은 사내의 몸선을 따라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눈을 마주치려는 순간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들러주세요. 또 저번처럼 말없이 사라지지 마시고요.”
대답을 고민하고 있으면 문득 라이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뻔한 대답인데 안 듣고 말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돌아서는 빛의 전사를 배웅하며 라이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게 있어 노르브란트의 영웅이란 겨울철 극지대의 밤하늘에만 나타난다는 과학책 속 오로라만큼이나 기묘하고 신비로운 존재였음에도, 그가 저토록 말이 없을 때면 작별을 건네러 오지 않으리라는 것쯤 이제는 눈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2.
흰머리가 거슬리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새치인가, 몇 올 나고 말겠지 했는데. 요즘은 거울을 볼 때마다 흰머리부터 눈에 들어오는 거 있지. 그게 싫어서 거울도 들여보지 않게 됐어. 어차피 겉모습에 호도될 나이는 지났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도 한 사람 말고는 없다는 거 알잖아. 심지어는 그 녀석도 내 외모는 아무려면 상관없다고 하고. 되는대로 하고 다녔더니 사람들이 다들 늙었다고 놀리더라….
푸른 동상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빛의 전사는 하염없이 떠들었다. 듣는 이에게서 반응이 있거나 없거나, 그의 모험담은 크리스타리움에서 가장 낮은 유리돔 아래로 해가 넘어가는 시간까지 이어졌다. 후드를 덮어쓴 동상 정수리에는 유달리 각진 부분이 있었다. 빛의 전사는 그 즈음에 귀가 있겠거니 하고 귓속말을 흉내내기도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그의 앞에서 털어놓아야 했을 일들이다. 에오르제아 사람들이 수호천절을 기리고, 저 멀리 동방에서 매해 망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떠난 이가 깃들었다 여겨지는 장소는 그게 어디든 특별했다. 갈 곳 잃은 감정을 되새기고 터뜨리는 것만으로도 산 자는 안식을 얻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속을 어지럽히던 볼썽사나운 응어리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수정공은 식사를 하지 않으니 모험담이면 족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겪었던 일을 재주껏 각색까지 하여 떠들었다. 이제는 그가 수정공이 아닌 수정공의 형체를 한 조각상에 불과하다 해도, 그라하 티아가 알고 있는 모험담이라면 이 세계에 남기로 한 수정공에게도 그것을 알려주어야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하는 건강해. 당연한 말이지만.
나보다도 훨씬 팔팔해. 아직까지 만나고 있느냐고? 아, 네게는 말하지 않았던가. 살림을 합친 지 좀 됐어. 그 녀석 동거는 처음이라고 하더라. 같이 살자고 했더니 눈이 물고기처럼 툭 튀어나와서는 입술만 뻐끔뻐끔하는데, 그 모습이 새삼스럽게 사랑스러워서 말 꺼내길 잘했다 싶었지. 정식으로 반지를 맞춘 건 아니지만 바깥에서 보기에는 연인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어. 살림까지 합쳤으니 이제 연인보다는 부부가 어울리겠네. 뭐 다른 게 모험이고 부부겠어? 나 같은 모험가에게 모험은 삶이고, 그걸 평생 함께 해 줄 사이라면 부부라고 해도 좋겠지. 오늘은 생색 내러 왔어. 네 부탁은 지금도 이루어지는 중이라는 말을 하려고. 이쪽 분야에서는 에오르제아 순위권을 다툰다는 산크레드도 너한테는 아름답고 시적인 언어보다 서툴더라도 솔직한 진심이 더 잘 먹힐 거라고 하더라. 그 뒤로 딱 이틀 고민했고, 이틀 뒤에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우리는 난롯가 앞 소파에서 끓인 차와 커피를 마셨고, 나는 내 삶에서 가장 단단하고 높은 닻, 그게 너였으면 한다고 했어.
에오르제아는 여전히 평화롭다. 마지막으로 왔을 땐 커르다스 이야기를 했었지? 재생 에너지 덕에 초목이 다시 자라나고 있다고. 덕분에 이슈가르드는 살 맛이 났어. 일 년 사이 이슈가르드와 울다하를 오가는 보부상이 세 배는 늘었고, 대규모 호위를 요청하는 임무도 달에 두 건은 들어와. 또… 반 년 전인가. 에스티니앙은 연금 대신 커르다스에서 가장 먼저 눈이 녹은 토지를 하사받았는데, 자기가 농사를 지을 일은 서부 고지의 설원이 목초지로 뒤덮일 때까지 없을 것 같대서 그냥 내가 관리하기로 했지. 요즘은 그 땅에서 과일 심는 재미로 산다. 농사가 전투보다 더한 중노동이라는 거 알아? 낡은 농기구 하나가 웬만한 단창보다 무거워. 종일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뙤약볕 아래서 종일 일해도 휴일이 없는 데다,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전리품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게 특히 고역이지. 그래도 원하는 과일을 마음대로 심을 수 있다는 것 하나는 좋더라. 나는 이제 단맛 강한 과일보다 조금 싱거운 게 더 좋아졌어. 나이가 들면서 입맛도 바뀌어버린 거겠지. 과육이 묽고 슴슴한… 그래, 무른 참외나 배 같은 거.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어. 구 '새벽'과 총사령부도, 이슈가르드와 알라미고도, 샬레이안과 갈레말도. 끝없을 줄 알았던 전쟁과 갈등이 기적처럼 사그라들었어. 세계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됐어. 나는 내 필요를 느낄 수 없었어. 날 원하는 이들은 이미 모두 내 곁에 있었고, 손 뻗으면 닿는 곳에 나를 누구보다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었지. 덕분에 은퇴를 결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여생을 보내고 싶었어. 그렇게만 하면 나에게도 평온한 일상이 허락될 것 같았어. 그랬는데.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나는 여전히 달에 한 번씩 악몽을 꾸고, 그 꿈에는 잃어버린 사람들이 나오고, 내가 뒤척이는 소리에 잠을 설친 그라하가 다시 나를 걱정하고….
그렇게 다시 일 년이 지났네.
실컷 쏟아낸 다음에는 푸른 동상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산 자들이 어떤 착각을 하든, 동상은 광물답게 번쩍번쩍 매끄러운 빛을 냈다.
바라본 눈에 초점이 없었다. 동공과 흰 자위의 경계가 남지 않아 어디를 보는지 알기 어려웠다. 이쪽을 보지 않는 눈. 눈가 아래에는 후드의 그늘이 여전했다. 다정하게 웃고 있지만 결코 마주볼 수 없는 눈. 기괴하기도 했다. 여상하게 말을 이어가던 빛의 전사는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무사하고 평화로워.
나는 내 할 일을 마쳤어.
그런데도 가슴 한구석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떠나보낸 이들의 빈자리가 흉곽에 바람 구멍처럼 남아 걸을 때마다 새액새액 소리를 냈다. 남은 이들의 미소를 보고 있어도 떠나간 이들의 마지막이 떠오르는 날이 있었다. 오금이 저릿하더니 하중을 받친 다리가 한순간 무너져내렸다.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척추뼈를 따라 찌르르 고통이 번졌다. 잠잠해질 무렵이면 복병처럼 덮쳐드는, 빌어먹을 과거의 트라우마였다.
지키지 못한 것. 포기해야 했던 목숨과 약속. 떠올릴 때마다 독 발린 화살촉은 항상 자신을 향했다. 식도끝에서 위액이 치밀어오르며 시큼한 맛이 났다. 지금까지는 다음 임무가 주는 긴장으로 어떻게든 죄책감을 덮어 왔었는데. 공백을 양분 삼아 미련은 더욱 깊은 곳까지 뿌리내렸다. 굳은살이 박였다고 생각한 자리는 짓무른 채였다. 그 위치에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구태여 자극하지 않았을 뿐. 피딱지로 덮였을 뿐인 환부를 옅은 바람이 쓸고 지나가면 빛의 전사는 불에 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숨을 헐떡이다 못해 수정공의 동상에 안겨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이명이 들렸다가 했다. 공황과 과호흡이 함께 터졌다. 호흡하고 있는데도 숨이 모자랐다. 제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괴로워 보는 건 오랜만이다. 눈물이 흐르고 뺨이 온통 젖어 마주 댄 푸른 동상이 시리도록 차가웠는데 그게 생리적인 것인지 감정의 과잉으로 인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엇…!”
그때 뒤통수 쪽에서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벽면에 기대 아이 하나가 넘어져 있었다.
“넌…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아이는 무릎을 톡톡 털고 일어났다. 인기척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니, 끓던 속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사람을 의식하자 널뛰던 호흡도 빠르게 보통 속도를 찾아갔다.
“아저씨야말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어…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구경하러 온 거야.”
“거짓말, 얼굴이 이렇게 붉으면서. 당장 수정공에게서 떨어지세요. 위병단장님을 부르겠어요!”
이건 또 어디서 나타난 녀석인지, 젖은 눈가를 훔치며 빛의 전사는 아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열 살쯤 되었을까. 또래에 비해 덩치는 작아도 눈매가 곧은 것이 제법 강단 있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렇게 보니 머리카락 뻗친 모양이 익숙하기도 하고,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그게 어디였는지가 가물가물했다. 부모님 몰래 찬장의 사탕을 빼먹다가 걸리기라도 했다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아이는 빛의 전사가 다가서자 온몸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곳은 출입이 금지된 장소라고요! 크리스타리움 사람도, 위병단 소속도 아닌 외부인이 와도 될 곳이 아니에요!”
“아니, 나는 외부인이 아닌…”
“그것도 거짓말! 전 이 도시에 오래 살아서 알아요. 크리스타리움 사람들은 빈민을 빈민인 채 두지 않아요. 아저씨처럼 지저분하고 퀴퀴한 사람이 시장 거리를 돌아다녔다면 다들 먹이고 씻기고 입혀서 번듯하게 만들어주었을 거예요.”
빛의 전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이 도시는 몸이 불편한 빈민조차도 멀쩡한 노동력으로 바꾸어버릴 만큼 과격한 기술력과, 사람이라면 누구든 대접받을 가치가 있다는 수정공의 고집스런 신념이 협업하여 탄생한 비현실의 극치였으니까.
아이 치고 대거리하는 솜씨가 남다르다는 점을 칭찬해야 할까, 고민하던 빛의 전사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우선 오해부터 풀어두기로 했다.
“지저분이라니… 내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간만에 얼굴 본다고 옷까지 다려서 왔는데.”
“겉모습만 문제가 아니거든요? 조금 전까지 수정공을 부둥켜 안고 동상째 가져가려고 하고 있었잖아요. 꼭 도굴꾼처럼.”
그러나 아이는 맹랑하기만 한 게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했다. 피식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도굴해서 어디다 팔아? 이런 크기는 눈에 안 띄게 옮기지도 못해.”
“…….”
“조심스러운 태도는 좋지만, 나는 정말로 평범한 모험가야. 오늘은 수정공이 잘 있나 보러 온 것뿐이고… 다른 뜻은 없어. 라이나를 불러서 확인해도 좋아. 울었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지만.”
“…울었다고요? 왜요?”
빛의 전사는 멋쩍어하며 턱을 긁적였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친한 사이였거든.”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아이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빛의 전사의 차림새를 훑었다. 고작해야 열 살 남짓의 아이는 줄글로 배운 수정공이라는 인물에게 친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빠도 너희처럼 어릴 때가 있었단다, 못 믿겠지? 농담조로 덧붙인 빛의 전사가 민망한 웃음을 띄웠다.
“정말이야. 제법 친했대도. 그 녀석과 함께 싸웠던 어둠의 전사가 나였으니까.”
동시에 정적이 흘렀다. '어둠의 전사'라는 말에 아이는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어둠의 전사님이 이렇게 초라하고 늘어진 모습일 리 없잖아요…. 수정공이 떠난 뒤 어둠의 전사님을 사칭하는 사람은 많았다고 하지만, 진짜 그분은 오십 보 바깥에서도 빛이 나는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그건 좀 과장된 소문 같은데.”
“아뇨! 그쪽이 정말 어둠의 전사님이라면 옷깃만 보고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분은 멸망하는 세계를 구제할 만큼 강하고, 악담을 듣거나 배신을 당하고도 전혀 화내지 않을 만큼 선한 데다 온몸에서 광채가 흐를 만큼 멋진 분이니까요! 할머니 말씀이 틀릴 리 없어요. 제 이름도 어둠의 전사님이 지어 주신걸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찬사(과장이 심하긴 해도)에 빛의 전사는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내가 세계를 구하고 악담을 듣고 배신을 당하긴 했어도 화가 없거나 몸에서 광채가 나지는 않아,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이름이라니? 돌이켜보면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아, 있었던 것도 같다.
세계에 어둠이 돌아오고 수정공이 아직 도시의 수장이었을 무렵. 거주관에 머물던 젊은 부부에게 갓난아이의 탄생을 축복해 주었으면 한다는 부탁을 받았다. 그해 크리스타리움에는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 모렌이 말하기를 전쟁 특수, 그 비슷한 거라고 했다. 전쟁을 끝마친 도시에서는 역사적으로 신생아가 폭증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던가. 아무튼 아이는 그중에서도 작게 태어난 편이었다.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지만 흄족 신생아들 평균에는 못 미치는 무게였고, 그 아이가 첫 아이였다는 젊은 부부는 구석구석 걱정이 깃든 낯빛으로 어둠의 전사를 찾아왔다. 영웅의 축복을 받은 아이라면 분명 건강하게 자라나겠지요. 한탄하는 모양새가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젖먹이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며 돌아나오는 길이었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가디건 한 장 걸치지 않은 몸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우물쭈물하던 그는 아직 정하지 못한 자식의 이름을 지어달라 말했다. 아끼는 채집도구의 이름을 좋아하는 먹거리로 붙이고 다니는 등 괴악한 네이밍 센스를 자랑하는 빛의 전사로서는 거절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상대가 수정공의 도시 사람인 이상 그럴 수는 없었고, 얼떨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늦저녁 밤하늘에는 그날따라 별이 가득했다. 돔 너머로 이름 모를 별자리를 바라보던 빛의 전사는 삼십 초가 넘는 애매한 침묵 끝에, 에오르제아의 밤하늘을 수호하는 별과 운명의 여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니메이아?”
“…어, 제 이름을 어떻게?”
설마 당신이, 정말로?
둥글어지는 아이의 눈을 보며 빛의 전사는 아주 오랜만에 익숙한 희열을 느꼈다. 은퇴를 결정한 뒤로는 느끼지 못했던 누군가의 감탄 어린 시선이, 당시에는 그렇게나 부담스럽더니 이제 와서는 반가워지고 말았다는 데 웃음이 다 나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반가움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이는 고개를 늘어트리며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시선을 돌리자 크리스탈 타워가 반짝였고, 때늦은 깨달음에 빛의 전사는 숨을 들이켰다.
돌아본 타워의 크리스탈에 자신이 비쳐 있었다.
거울을 제대로 보는 게 얼마만이더라? 관리에 소홀해진 몸은 대강 보기에도 엉망이었다. 밭일과 집안일로 허리가 조금 곱았고, 눈가에 패인 주름과 기미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흉측한 데다 머리 곳곳엔 듬성듬성 흰 머리까지 나 있었다. 영웅이라고 해서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런 꼴을 본다면 누구라도 자신을 영웅이라 생각하지는 않겠다 싶었다. 그 모습에 니메이아는 자신보다 더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전설 속 어둠의 전사님이 이렇게나 볼품없고 초라한 꼴로 나타난다면 환멸이 나는 것도 당연하겠지. 조금이라도 관리를 해 놓을 걸 그랬나.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은퇴까지 한 마당에 자존심이 뭐 별거라고. 동심을 무너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큼, 큼… 네 말이 맞아. 어둠의 전사라는 말은 장난이고, 그냥 수정공의 오랜 친구야. 네 이름도 그 녀석한테 들었어. 왜, 너희 부모님에게도 친구가 있듯이. 수정공에게도 친구가 있었거든.”
그 대가로 어른의 양심을 바치라면 바쳐야 하는 법. 다행히 변명이 통했는지 아이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끄덕였다.
“수정공의 친구라고 하시니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실 저, 그분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비밀? 녀석에게 내가 모르는 비밀이 또 있었나? 빛의 전사는 눈꺼풀을 끝까지 들어올렸다. 생뚱맞은 소리로만 들렸다. 그러나 아이는 입가에 검지를 대고 쉬잇, 하더니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당부를 하며 빛의 전사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정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죠? 어른들이나, 라이나 대장님께도? 눈치를 살피며 묻는 소리에 빛의 전사는 하는 수 없이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 안 말할게.”
그러자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좋아요, 그럼…. 크리스탈 타워에는 유령이 산다는 소문이 있어요. 들어보셨죠? 자정을 넘긴 늦은 밤, 출입이 금지된 옥상에서 사람 말소리와 발소리가 들린다고요.”
“그러고 보니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저씨는 크리스타리움 사람이 아니니까 모르는 거예요. 제 친구들은 전부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요.”
“어… 으음, 그렇구나.”
“저는 그 유령의 정체를 알아요.”
“그 정체가 뭔데?”
“그건, 사실… 수정공이에요.”
느닷없는 폭로에 웃음이 터졌다. 밤에만 나타난다는 타워 속 유령의 정체가 수정공이라니. 후드 차림으로 유령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는 수정공을 상상하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빛의 전사는 대답을 고민했다. 어차피 셋 중 하나였다. 라이나거나, 옥상 청소 담당이거나, 빛의 전사 자신이거나. 마지막은 지난 일 년 간 방문이 뜸했으니 빼고. 그렇다면 라이나 아니면 청소 담당 짓이란 말인데. 대충 가늠해도 전자일 것 같았다. 옥상 출입 권한에다 남들 모르게 수정공을 찾아와야 할 그럴싸한 이유까지 갖춘 건 한 명뿐이었으니까. 라이나의 체면을 생각하면 말하지 않는 게 낫나? 모르겠으니 아무렇게나 둘러대기로 했다.
“타워에 남아있던 마물 짓 아닐까? 수정공은 지금 굳어 있고, 여긴 원래 마물 소굴이었다잖아.”
“…….”
“…물론 나도 직접 본 건 아니고, 큼, 어디서 들은 거지만.”
그러자 아이가 발을 동동 굴렀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토라지며 팔짱을 낀 아이가 끝끝내 라이나를 불러왔다. 정확히는 불러온 게 아니라 견학 나온 아이들의 인원수가 하나 줄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라이나가 확인차 옥상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달려온 라이나는 빛의 전사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적어도 수 초는 말이 없었다.
눈물 묻은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그 노력은 전부 수포로 돌아갔고, 라이나는 딱딱하게 굳어서는 여길 노려보고 있고… 옳다, 망했군. 데굴데굴 눈알만 굴리던 빛의 전사는 아예 처음부터 사정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수정공에게 회포를 풀던 중에 아이와 마주친 것. 얼굴이 붉다며 도굴꾼으로 오해를 사버린 것. 신분이 난감해져 있으나 아이의 동심을 위해 스스로 어둠의 전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는 않다는 것까지. 아이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속삭이면 라이나는 상황을 이해했다는 양 차분히 끄덕였다.
“니메이아, 이 분은 어둠의 전…”
그리고 라이나가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 빛의 전사는 황급히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안 돼. 그거 말하면 난리 난다. 얘 동심도 망하고 어둠의 전사 체면도 망한다. 눈짓으로 곤란함을 피력했다. 어쨌거나 위병대장쯤 되면 눈치가 빠를 수밖에 없어서, 라이나는 육성으로 된 지시 없이도 빛의 전사의 처지를 받아들여주었다.
“어둠의 전사님과 수정공의… 친구분이셔.”
어른 둘이서 속닥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는 아니나 다를까, 입을 비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나만 쏙 빼놓고. 난감해진 빛의 전사는 화두를 돌릴 필요를 느끼고, 아예 동상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별건 아니고, 그냥 옛날 이야기 좀 했어.”
아이는 여전히 보로통한 표정이었다.
“수정공에 대한 건데, 너도 들을래?”
다행히 아이는 수정공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무섭게 눈을 반짝였다. 이 도시 사람이라면 누군들 녀석에 대해 궁금해하게 마련이었기에 십 년 전부터 최후의 보루 삼아 아껴두고 있었던 화제였다. 원래는 수정공 혹은 그라하 본인에게만 조심스럽게 들려줄 생각이었지만, 사실 듣는이가 한둘 늘어난다 해도 안 될 건 없었다. 더는 숨겨야 할 이야기도 아니었고,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이 연인의 이면까지도 기억해준다면 이쪽으로서는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때 어둠의 전사는 겨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풋내기 모험가였고, 수정공은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사학도였어. 처음 마주쳤던 날은 유난히 햇살이 뜨거웠댔지.
목을 가다듬은 빛의 전사가 느슨하게 말문을 텄다. 첫만남부터 하나씩 되짚을 생각이었다.
그 자식 어릴 땐 정말 제멋대로였거든. 웬 이상한 놈이 시비를 거나 싶었더니 대뜸 뛰어내려서는 아는 체를 하질 않나, 승부를 하자기에 응했더니 그걸 가지고도 감탄을 하지를 않나. 첫인상은 진짜 특이한 놈이다, 딱 그 정도였는데. 타워를 조사하는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더니 정이 들어버렸대. 요마의 안개가 조사지를 휩쓸 때면 다같이 고립되기 일쑤에다, 탐사가 늦어지면 일인용 텐트에 침낭 둘 깔고 엉망으로 잠들기도 했고, 식성이 비슷해서 세 끼를 함께 챙길 때도 많았다더라. 그렇게 몇 달을 부대끼는 여정 속에서 녀석은 갑작스럽게 철이 들었고, 이별은 하루아침에 찾아왔고, 그들이 재회한 건 어처구니없게도 이곳 노르브란트였어.
그 다음은 너희가 학교에서 배우는 대로고. 남일 말하듯 어깨를 으쓱인 빛의 전사가 니메이아의 '정말 꾸며낸 이야기 같다' 하는 표정에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못 믿어도 별수없지만,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정말이야. 가라앉은 목소리가 뒷부분을 이어갔다. 다시 만난 세계에서 그가 자신을 어떻게 농락했는지, 어떤 식으로 희생하고 어떤 식으로 구원했는지. 이별하던 날에는 몸이 지치고 눈앞이 흐릿해 그가 지은 미소를 또렷이 기억할 수 없었으나 잡은 손은 처음 만났던 날의 햇살처럼 따사로웠다는 것도. 말재간이 부족해 한참 걸렸지만 아이는 지루해하는 기색 없이 들어주었다.
말을 마치고 젖은 눈으로 타워를 돌아보는 빛의 전사를 향해, 아이답게 천진한 목소리가 물어왔다.
“수정공과 사이가 좋으셨나 봐요? 엄청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시네요.”
“…당연하지.”
순간 당황해서는 뜸이 들어갔다.
“나는… 그를 사랑했어.”
아무렇게나 둘러대어도 그만인 질문이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빛의 전사는 한 차례 동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입모양만으로 덧붙였다.
아니다.
사랑하고 있어, 지금도.
아이는 작은 머리를 좌우로 기울이며 둥근 눈을 깜빡거렸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남녀, 그중에서도 부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빛의 전사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꼭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아이가 자라난 미래엔 그 입속말의 진심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회중시계와 빛의 전사를 번갈아보던 라이나가 시간을 알렸다. 슬슬 돌아가자는 신호였다. 니메이아의 어깨를 쥐고 있던 빛의 전사는 한 박자 느리게 끄덕였다.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다시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노을을 두르고 푸르게 빛나는 동상을 보고 있으면 생각의 잔가지가 걷잡을 수 없는 곳까지 뻗어나갔다. 이상하게도 미련이 남았다. 거기 선 것이 그라하 본인이었더라면 망설이는 빛의 전사를 향해 바보야 정신 차려, 일갈이라도 했을 텐데, 이곳에 남은 건 새파란 동상뿐이었다. 아직 어린 니메이아를 생각해서도, 두고 온 그라하 티아를 생각해서도, 해서는 안 될 말인 줄 알면서도 입이 움직였다.
“저기, 라이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세요.”
“이 동상, 내가 가져가면 안 될까?”
빛의 전사는 끝끝내 뱉어내고 말았다. 그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던 본심. 저열하고도 비겁한, 사랑의 순도를 스펙트럼으로 그려낸다면 불순의 극단으로 치우쳐 있을, 끈적하고 퀴퀴한 미련의 덩어리를.
“…네?”
“가져가고 싶어. 그리울 때마다 보고 싶어.”
때마침 흘러가던 구름이 태양을 가렸고, 빛의 전사의 콧등을 따라 짙게 그림자가 졌다.
“이제는 그래도 되잖아. 나는 더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세계를 구하는 것도, 목숨을 건 역경의 극복담을 들려주는 것도. 전부 그만두기로 했으니까. 이 세계도 완전히 자생하고 있고, 더는 내 도움이나 방문이 필요하지 않겠지. 그러니 이번을 끝으로 노르브란트에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야. …하지만 수정공만은 곁에 두고 싶어. 그렇게 하면 안심이 될 것 같다. 그라하도 더 걱정하지 않을 거고.”
라이나는 듣고도 잘못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다.
“어둠의 전사님…?”
“부수어서라도 가져가고 싶어. 조각만이라도.”
그것으로 쾅, 시황제의 옥좌 한가운데 달라가브만한 파문이 일었다.
“어둠의 전사님, 괜찮으신 겁니까?”
굳어버린 분위기를 뒤늦게 파악한 빛의 전사가 어름거렸다.
“…농담이야, 당연히.”
얼버무리고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본심이었다.
3.
수정공은 자신이 어떻게 의식을 차릴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마지막 기억은 시야를 덮은 후드 자락 밑으로 흐려지던 빛의 전사의 씁쓸한 눈웃음이었다. 익숙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부수어서라도 가져가고 싶다 중얼거리는 말이 들렸고, 눈을 떴을 땐 푸른 햇빛을 반사하는 대리석 바닥이 보였다.
생각해보면 그 몸에 생명이 남아있다는 전제부터가 이상했다. 에테르는 흩어졌고, 육체는 굳어버렸다. 혼은 빛의 전사와 함께 차원을 넘은 지 십 년이나 흘렀고, 남은 것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꺼져가는 불씨에 불과했다. 어느 순간 사그라들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의식의 편린. 검지만 않을 뿐 타고 남은 재나 다름없었는데, 불씨가 꺼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빛의 전사가 찾아와 그의 식은 몸에 장작과 애정을 때워주곤 했다. 아마도 그것이 잔존의 원인이었으리라, 수정공은 생각했다.
눈꺼풀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가 없었는데 시야가 개이면 항상 빛의 전사가 보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선명하게. 꼭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드문드문 끊기는 의식 속에 언제나 빛의 전사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몸이 굳어버린 탓에 전처럼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빛의 전사가 방문할 때면 기묘한 마법이라도 걸린 듯이 의식이 돌아오곤 했다. 처음 몇 번은 이게 다 그가 지닌 신비한 능력―초월하는 힘― 때문이 아닐까 싶었으나, 이따금씩 빛의 전사가 털어놓고 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빛의 전사가 끊임없이 찾아와 준다는 사실이 기껍기는 했다. 그렇게라도 그의 일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반응하지 않는 동상을 향해 그가 일상 속 사소한 일화를 늘어놓을 때면 수정공은 움직이지 않는 얼굴 근육으로 한껏 웃었다. 그렇게 마주할 때마다 조금씩 주름살이 늘어가던 빛의 전사는, 이번 방문에서도 여전히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흰머리가 거슬리기 시작했어.
너라면 흰머리도 잘 어울리겠는걸. 빛의 전사의 푸념을 들으며 수정공은 속으로 응답했다. 일방향이기는 해도 빛의 전사가 자신만을 위해 모험담과 고민거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건 수정공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는 호사였고, 입이 굳었다는 이유로 듣고만 있는 건 영웅에 대한 예우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하는 건강해.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대체로 덤덤한 얼굴로 말했지만 가끔씩 꿈틀거리는 미간의 주름이나 드물게 생겨나는 목소리의 음고, 오른쪽으로 조금 더 높게 올라가는 입꼬리 같은 것들이 수정공을 기쁘게 했다. 특히 그라하 티아에 대해… 자신에 대해 말할 때면 미세하게 밝아지는 낯빛이 좋았다. 맑게 웃는 모습의 빛의 전사는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웠고 때로 정도가 심할 때는 정수리 너머에 후광이 비쳐 보이기도 했다(분명히 보였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다들 못 본 척을 한 거다!). 그 웃음만은 눈가에 주름이 늘어난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수정공은 그의 노화를 인정하는 데 남들의 배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관찰력이 부족했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고, 실은 빛의 전사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건 상관없었기에 늘어가는 주름의 개수를 의식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흰머리가 나든 등이 곱든, 농기구에 눌린 어깨가 움츠러들고 자세가 구부정해지는 한이 있어도 수정공의 앞에서 그는 십 년 전과 같은 웃음을 간직한 영웅이었으니까.
물론 변한 것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정오를 넘긴 시간에 일어나 다음날 새벽 시간에 눕도록 느슨해진 생활습관, 은퇴 전에 비해 자주 놓치게 된 소대 훈련이나 주변인들의 연락을 거절하는 빈도 수가 늘어났다는 것, 단 맛보다 싱거운 맛을 먼저 찾게 되었다는 과일 취향 같은, 더는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된 것들. 처음 몇 년 정도는 그의 모든 변화를 기억할 수 없다는 데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마음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살아있기에 사람은 변하기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아쉬움보다는 성취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빛의 전사가 돌아가고 나면 수정공은 시황제의 옥좌에 덩그러니 남아, 영웅의 변화를 곱씹으며 웃지 못하는 입술로 쓸쓸하게 웃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빛의 전사가 반 나절이 넘도록 옥좌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런 낌새라면 알아채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미소에 그늘이 섞이기 시작했다. 영웅이라는 무게를 내려놓은 뒤로 그는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과거의 악몽에 괴로워했고, 늘어지는 나날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속앓이를 했다. 털어놓지 못할 고민을 잔뜩 끌어안은 채 빛의 전사는 하루하루 문드러져갔다. 생기를 잃어가는 두 눈을 지켜보자니 제 속까지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무사하고 평화로워.
나는 내 할 일을 마쳤어. 말끝에서 빛의 전사가 사레 들린 사람처럼 컥컥거렸다. 목을 부여잡은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숨이 모자란 것 같았다. 전에도 몇 번인가 비슷한 모습을 보인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유독 심해 보였다.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 무너지듯 기대오는 몸을 보며, 수정공은 오르내리는 등을 쓸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무력감이 들었다. 물어댄 탓에 부르튼 입술과 생리적인 눈물로 붉게 뜬 눈시울을 볼 수만 있을 뿐, 끌어안는 것도, 한 마디 위로를 건네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무력감이나 맛보고 있으려고 의식을 돌려받은 게 아닐 텐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닐지도 몰랐다. 언젠가 자신이 비슷한 실패를 겪었을 때… 그게 언제였더라, 노르브란트에 터를 잡고 반 세기를 조금 넘었을 무렵에, 도시가 모양새를 갖추고, 라이나가 성인이 되고, 짤막한 평화에 스스로 젖어들기 시작했을 무렵에. 갑작스럽게 터진 교전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유가족들을 만나고, 감당하기 어려웠던 희생자들의 수에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기분과 닮아 있었다. (어쩌고저쩌고..) 그날 내게 필요했던 건 위로가 아니라 존재였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음을 말없이도 이해해주는 타인의 존재.
그곳에 자신을 긍정하는 누군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그가 괴로운 듯이 심장을 쥐어뜯는 순간, 까무룩, 의식이 멀어졌다.
고해성사 같았던 긴 대면을 마치고, 빛의 전사는 거주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드러누웠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좀 자고 나면 정리가 되겠지. 부디 그렇기만을 바라며 침구를 끌어올렸다. 일 년만의 방문인데도 거주관 실내는 주기적으로 청소가 이루어지는지 꼭 새 방 같았다. 코를 묻은 이불에서 보송보송한 햇살 냄새가 났다.
늘어진 자세로 몸을 누이고 한 시간이 조금 못 되었을 때, 니메이아를 배웅하고 돌아온 라이나가 문을 두드렸다.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노려보던 빛의 전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나무문 밖에서 경색한 표정의 라이나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하겠습니다, 형식적으로 말한 라이나는 빛의 전사가 한발 비켜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실내로 걸어들어왔다. 붉은 망토를 두른 수정공의 손녀는 방 중앙을 차지하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놓았다.
“죄송합니다. 타워 옥상은 항상 잠가 놓다 보니 아이가 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아, 원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아이들이잖아. 나야말로 추한 꼴을 보였어.”
“그리 노골적인 말씀까지 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오늘은 제게 자리를 비워달라고까지 하셨으니,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지만요. 저희의 불찰입니다.”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정말로 괜찮은 건 아니었다. 자칫하면 도시 대표(전직이긴 하지만) 모독죄로 경이라도 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크리스타리움이 그리 권위적인 곳은 아니었다. 라이나는 무거운 낯으로 영웅을 바라보더니 데운 보리차가 담긴 잔을 건넸다. 위병대 보급품으로 보이는 담요와 공예관 수제 비스킷도 함께였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그, 이쪽이 아니라, 너머의 세계에서요. 조심스러운 물음이 따라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젓고 봤다.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이야, 하는데 어쩐지 변명하는 기분이었다.
“자주 있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도 가끔 옛날 일로 악몽을 꾸고, 내가 악몽을 꾸면 그라하는 함께 잠드는 연인이자 동료로서 나를 걱정해. 그런 날이면 수정공이 보고 싶어져서, 이번처럼 크리스타리움을 찾아올 때도 있고….”
넋두리를 하다 보면 생각에 잠긴 라이나가 입가를 감쌌다.
“그 악몽이라는 게 혹시… 수정공의 꿈인가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의 한쪽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비슷한 후유증을 겪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입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
“어둠의 전사님, 그건 우울증이에요.”
라이나가 또박또박 말했다. 우울증이라고, 내가? 빛의 전사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죽은 사람의 악몽을 꾸고, 혼이 남지도 않은 그분의 동상에 집착하고. 과거에 얽매여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 채 케케묵은 감정에 갇혀 괴로워하는 것. 그게 우울증이란 말입니다. 어둠의 전사님.”
익숙한 다정을 담은 보랏빛 눈동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아닌데.”
“하지만 괴로우시잖아요?”
트라우마를 겪는 건 어둠의 전사님 잘못이 아니에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침착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포장을 벗긴 비스킷이 손 위로 올라왔다. 이게 뭐냐, 고개를 기울이면 대답 대신 사근사근한 웃음만이 돌아왔다. 이십 년 전 죄식자와의 전투에서 부하를 잃고 무기력해 있던 저에게, 공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빛의 전사가 나사 빠진 표정으로 일관하는데도 다정 어린 잔소리는 이어졌다.
“적어도 자정 전에는 잠자리에 들도록 하세요. 늦게까지 깨어 있는 건 잡생각을 늘릴 뿐인 데다, 저도 그렇게 한 뒤로 많이 나아졌거든요.”
“그래….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예의상 끄덕여주었다. 경례 후 돌아나서려는 라이나를 빛의 전사가 불러세웠다.
“…아, 잠깐만.”
“말씀하세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침구는 언제 청소한 거야?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어?”
라이나는 정돈된 실내를 휘 둘러보며 후후, 웃었다.
“그럴 리가요. 여기는 당신의 방입니다. 다른 세계에 가 계시더라도 어둠의 전사님의 방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이곳은 펜던트 거주관이 처음 지어진 날부터 오늘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청소가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수정공의 고집이었거든요.”
“전에는, 일손이 모자르다고 했잖아.”
“그건 어둠의 전사님께서 이곳에 처음 오셨을 무렵 이야기니까요. 지금은 오히려 넘쳐날 정도인걸요. 도시 청소 정도는 주민 모두가 번갈아가며 맡고 있어요.”
혈연 없이도 유전되는 것이 있구나, 손에 놓인 비스킷을 입으로 옮기며 빛의 전사는 작게 중얼거렸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런 게 없어도 나는…… 외치려는데 라이나의 검지가 먼저 입술에 닿았다.
“마침 내일 모레가 디데이거든요.”
빛의 전사는 며칠 더 노르브란트에 체류했다. 수정제를 즐기고 가라는 라이나와 주민들의 권유가 있었다. 준비 위원장을 맡은 린과 가이아가 함께 인사를 나왔다. 이번 축제가 개최 이래 최대 규모라는 말은 정말이었는지, 노랗게 반짝이는 조명 아래로 가판대가 끝없이 늘어섰다. 십 주년 기념으로 조금 더 성대하게 해 봤다는 린의 설명이 이어졌다. 매대 사이로 걷다 보면 상품을 진열 중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누가 알아보는 것도 아닌데, 제 발이 저려 눈을 피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어딜 봐도 왁자지껄하게 술잔을 부딪히는 이들뿐이었다. 축제의 밤, 화려한 옷을 입은 주민들은 무대를 에워싸고 한껏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겼다. 다들 오늘만을 위해 지난 일 년을 살아왔다는 듯 소란을 떠는 이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불청객이 된 기분으로 이리저리 눈을 흘기고 있었더니 가이아가 손을 흔들었다. 이봐, 저쪽 대광장에 큰 무대 보이지? 잠시 뒤에 저기서 단합 무도회가 열리거든. 손짓한 가이아가 말했다. 린이랑 나는 함께 춤을 추기로 했어. 그러니까 당신은 그동안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가이아의 팔을 다정하게 붙잡은 린도 금방 다녀올게요, 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잘 다녀오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손을 꼭 쥔 채 사라졌다.
빛의 전사는 선물 받은 커피쿠키를 씹으며 야시장을 돌아보았다. 와삭와삭, 그새 레시피가 바뀌었는지 늘 먹던 것과 조금 다른 맛이 났다. 목이 메이는 것도 같았다. 물이 절실했는데 다들 짠 것처럼 주류만 팔고 있었다. 거품 오른 맥주가 눈에 들어왔다. 단합회라는 취지에 걸맞게 무대가 설치된 응접 대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짝을 이루고 있었다. 단란한 가족, 동료로 보이는 모험가 일행, 하물며 안내를 자청한 린과 가이아까지도.
내장이 버석이며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무얼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이곳 노르브란트 땅에 이방인은 한 명뿐이었다. 아무도 따돌리지 않았으나 빛의 전사는 홀로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들고 있던 맥주잔을 벌컥 들이켰다. 종족 공용으로 만들어진 잔은 단숨에, 정말 단숨에 바닥을 보였고, 문득 수정제 기간에는 타워 옥상을 개방한다는 라이나의 말이 떠올랐다. 숨이 붙어있지 않다고는 해도, 노르브란트 최초의 이방인은 아직 그 자리에 있을 터였다.
지금 가면 볼 수 있을까?
빛의 전사는 충동적으로 생각했다. 라이나의 경고가 떠올랐다. 이렇게나 사지가 떨려오고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병증이 아닌 것도 이상했다. 피와 알코올이 역류하며 내달려서 속이 울렁거렸다. 드디어 미친 건가 싶어 고개를 터는데 하늘에 뜬 달이 두 개로 보였다. 미친 게 아니라 취한 거군. 차라리 그 편이 다행이기는 했다. 동상을 품에 안기만 하면 전부 괜찮아지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투명한 맥주잔 바닥으로 장막 대문이 비쳤다. 계단을 어떻게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달리고 있었고, 이동기를 조작하는 손이 고장난 것처럼 떨려왔고, 숨이 차오를 무렵 꼭대기가 보였다. 원래는 맥주 한 잔에 취할 만큼 술이 약하지는 않았는데, 분위기와 트라우마에 뇌수까지 휩쓸린 게 분명했다.
옥상으로 이어지는 문이 덜컹 소리를 냈다. 푸른 동상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빛의 전사는 평범한 구경꾼인 척하며 인파에 섞여들었다. 수정공의 실물을 처음 보는 아이들은 저들끼리 알아듣지 못할 말로 떠들어댔다.
생각보다 덩치가 작았구나, 오른팔이 반투명하다는 게 정말이었구나, 미소 짓는 모습으로 잠들었다는 것도 진짜였구나. 두런거리는 말소리를 한 귀로 흘리다가, 빛의 전사는 저도 모르게 발을 뗐다.
그가 다가서자 사람들이 갈라졌다. 시선이 다발로 꽂혔다. 다들 이방인의 돌발행동에 주목하는 눈치였다.
몇 미터 이상 다가가면 안 된다, 뭐 그런 가이드라인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수정공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자 세상이 느려졌다. 시야가 흑백으로 변하고, 숨을 쉬는 법이 잘 기억나지 않더니 곧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푸른 동상만이 달빛을 반사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키스가 하고 싶었다. 입을 맞춰야 할 것 같았다. 후드 아래로 살짝 드러난 입매가 일상 속에서 늘 핥고 빨았던 도톰한 입매와 겹쳐 보였다. 옥좌의 중앙, 대리석 바닥을 딛고 선 빛의 전사는 곱은 등을 조금 숙였다.
익숙한 각도였고, 익숙한 입맞춤이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저 사람 뭐야? 미쳤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잡음처럼 멀어졌다. 주민들이 경탄하거나 말거나 빛의 전사는 푸르고 매끈한 입술을 핥으며 보란듯이 웃었다.
그 순간 펑, 하고 터진 것이 불꽃이었는지 수정공의 머릿속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입술이 닿는 순간 수정공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의식이 환해졌다. 입맞춤으로 저주가 풀리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그가 불꽃이라면 제 입술에 달린 것은 도화선이었다.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그래서 눈을 감을 수도 없었지만, 그의 혀가 입술을 핥는 순간 시야가 맑게 개이고 의식이 한층 또렷해졌다. 새카만 밤하늘에 폭죽이 피어 올랐고, 눈앞에는 사랑하는 빛의 전사가 있었고, 이런 게 사후 세계라면 자신은 천국에 온 게 확실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4.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어젯밤 수정제에서 웬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수정공의 동상에 입을 맞췄대. 그런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대. 너무 자연스러워서 다들 행사인 줄 알았다지 뭐야! 저잣거리에 떠돌기 시작한 소문은 남자의 정체를 추측하려는 무수한 시도와 함께 퍼져나갔다. 실은 그가 수정공의 숨겨둔 애인이었다는 말, 수정공을 오래도록 짝사랑한 전직 위병대원이었다는 말, 외부에서 흘러온 정신이상자였다는 말, 이것저것 있었지만 역시나 그런 모습의 사내를 어둠의 전사라 추측하는 얼뜨기는 없었다. 또 몇 달은 시끄럽겠군, 생각하며 빛의 전사는 펜던트 거주관에서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가져온 건 많지 않았지만 가져가야 할 건 많았다. 산크레드에게 전달할 린의 편지, 페오가 준 독초인지 약초인지 모를 들풀 세 뭉치, 파노브 마을에서 보내온 비올라 꽃 수십 송이. 선물과 잡동사니를 한 가방에 욱여넣으며 빛의 전사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수습해야 할 것도 있고 당부까지 받았으니 라이나에겐 작별 인사를 남겨야 했다. 잔소리가 한참 따라붙겠지만 자업자득인 셈 치고 경청할 생각이었다. 그런 뒤엔 니메이아의 가족을 찾아가 아이가 아주 싹싹하고 맹랑하니 장래엔 모험가를 해도 좋겠다 전하고, 율모어에 들러 더는 쓰지 않게 된 장비를 팔아 넘기고, 한동안 비워 놓을 거주관 짐 정리까지 마친 다음엔… 원초세계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라하 티아에게 돌아갈 차례였다.
보고 싶었다.
충동적이었다고는 해도 수정공에게 입을 맞춰버린 탓인가, 살아 움직이는 그라하 티아가 더없이 보고 싶었다. 자신을 보며 웃는 말갛고 다정한 얼굴. 기쁠 때면 한 방향으로 솟는 귀와 꼬리, 사랑을 말할 때면 긴장하는 단단한 어깨와 가을철 햇과일보다도 싱그러운 입술. 이제는 함께 나이를 먹는 처지였지만. 그렇게 조금 슴슴한 맛이 된 입술마저 좋았다. 빵빵해진 가방을 덮어 놓으며 빛의 전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 그라하 티아.
때마침 창밖으로 비친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같은 별을 살아가는 한 원초세계의 그라하도 지금쯤이면 잠자리를 준비하며 같은 달을 올려다보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내일이면 만날 수 있다, 실실 튀어나오는 웃음을 죽이며 빛의 전사가 이부자리를 끌어올릴 때였다. 광장 방향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뎅그렁, 뎅그렁… 정확히 열두 번.
빛의 전사는 이불을 든 채로 우뚝 굳어버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방문 첫날 니메이아가 했던 말이 환청처럼 스쳐지나갔다. 타워의 유령은 항상 자정 너머에 움직였다고? 어귀가 맞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유령 후보는 셋, 빛의 전사는 지난 일 년 크리스타리움을 찾지 않았고, 청소 담당은 주민 모두가 번갈아 맡는다고 했고, 라이나는 자정 전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유령의 정체는, 기이한 예감이 엄습했다.
설마.
다리가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축제가 파한 거리에는 구겨진 컨페티와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발에 채이는 것들을 밟고 지나쳐 원개좌를 가로질렀다. 설마, 설마. 정리하다 만 매대가 남겨진 주위로 노란 조명이 빛났다. 대광장을 지나면 장막 대문이 보였다. 축제의 영향인지 아무도 출입구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 느리게 열리는 문을 박차고 나선 계단을 뛰어올랐다. 달리는 내내 벅찬 숨으로 그의 이름이 터져나왔다. 녀석이 늘상 이용하던 이동기를 타고 타워를 끝없이 올랐다. 꼭대기에 도착하자마자 빛의 전사는 탄성을 터뜨렸다. 극장과 옥좌를 잇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처음부터 닫은 적도 없었다는 듯이.
밤하늘과 난간이 마주 닿는 위치에 푸른 인영이 있었다. 옥상에는 둘뿐이었다. 찰나, 구름결에 가려져 있던 달이 드러나고, 동상에 빛이 드는 순간, 빛의 전사는 아연해졌다. 굳어 있던 동상의 입매가 기적처럼 휘는 게 보였다.
웃었다. 웃은 게 분명했다. 그의 웃음이라면 수백 번도 넘게 보아왔기에 알 수 있었다. 거기 녀석이 있었다. 그것도 타워의 유령이라는 기가 막히는 이름으로. 십 년의 미련 정도는 백 년의 세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굳어버린 동상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론 단계부터 차근차근 따져볼 이성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웃고 있었다는 사실로 모든 것이 용서받은 기분이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걸로 마지막이었다. 빛의 전사는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로 외쳤다.
“왜 기다린 거야.”
내가 계속해서 너를 찾아왔기 때문에?
이곳의 너에게 미련을 품었기 때문에?
“이젠… 안 올 거야.”
악을 쓰는 기분이었다.
“오더라도 너를 보러 오진 않을 거야.”
수정공은 계속 답이 없었고,
“그러니까 잘 지내야 해. 이곳 사람들과 함께,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빛의 전사는 수정공의 이마에 한번 더 입을 맞추었다. 이마를 고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지금 입술을 맞대면 그의 선명한 웃음기가 전해질 것 같았고, 그러면 다시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온전한 입맞춤은 원초세계의 그라하 티아를 위해 남겨두어도 충분했다. 입을 맞추자 거짓말처럼 닿은 이마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짠 맛이 나는 게 완연한 사람의 살갗 같았다.
그러자 미련이 씻겨내려가고, 수정공의 안에 남아있던 의식도 완전히 꺼지는
두고 온 자들에 대한 불안을 씻을 수 없었던 이유를. 그들이 정말로 괜찮으리라 확신하지 못했었는데. 불안을 게워내려 했던 지난날의 시도가 전부 바보같이 여겨졌다. 지워지지 않을 얼룩을 억지로 지워내려 했으니 속이 쪼개지듯 불편할 수밖에. 불안은 덮어서도 무시해서도 안 되고, 그 자리에 있음을 인정한 채 동행해야 하는 거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안심이 되었다. 줄곧 안고 싶었던 수정공을 안아보면서...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는 안심을 얻고, 지난 세월의 미련이 전부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다음날 빛의 전사는 동이 트기 전 짐을 챙겨 나왔다. 일과를 준비 중이던 라이나에게만 짧은 인사를 남기고, 계획해 놓았던 나머지 일정은 다음 방문을 기약할 생각이었다. 돌아가려는데 장막 대문 계단에 사람 형체가 보였다. 작은 몸집이 드워프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계단 구석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는 니메이아였다. 빛의 전사를 발견한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안녕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별을 보고 있었어요. 새벽별은 해가 뜨면 사라져버리거든요."
그러는 아저씨야말로 어딜 그렇게 가세요. 꼭두새벽부터 어딜 가냐고 묻는 아이의 음성에 빛의 전사는 슬며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유령의 정체… 네 말이 맞았어.
5.
원초세계로 돌아오자마자 빛의 전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라하를 찾았다. 어딜 다녀왔냐는 물음은 없었다. 눈을 보고 냄새를 맡으면 숨길 수 없게 마련이었지만, 그라하는 빛의 전사가 원하지 않을 물음을 구태여 던지지 않았다. 대신 입을 맞춰 주었다. 길고 담백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혀를 섞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오래도록 입술을 맞대고만 있었다.
그 다음엔 빛의 전사가 먼저 안겨들었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어느샌가 함께 바닥 위를 굴렀다. 잘 다녀왔어? 그라하 티아가 물으면 빛의 전사는 엉뚱한 물음으로 되받아쳤다.
“우리 아이나 하나 입양할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여지껏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 없었잖아. 품에 안긴 그라하가 배시시 웃었다. 따끈한 몸을 끌어안고 이마부터 아래 뺨까지 빠짐없이 입맞추며 빛의 전사가 속삭인다.
“이제야 준비가 된 것 같거든.”
“무슨 준비?”
“인생 다음 막으로 나아갈 준비.”
같은 자리에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이 주름진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너 치고 준비가 늦어진 감은 있지만. 마찬가지로 늙어가는 몸, 더는 미성이라 부를 수도 없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기왕이면 아이는 잔뜩 두고 싶어. 알잖아, 태양의 추종자들은 씨족 사회라는 거.”
세계의 주박이 풀렸다. 1세계와 원초세계를 잇고 있던 정체불명의 타래가 완전히 끊어져 나갔다는 뜻이었다. 이유는 불문에 부쳐졌다. 두 세계는 다시 각자의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듬해 빛의 전사가 다시 노르브란트에 방문했을 때 그는 조금 더 수척해진 모습이었고 양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과일 바구니를 한아름 들고 나타났다. 빛의 전사는 라이나와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는 듯하더니 에테르학 교습소의 선생이 된 린에게 과일 바구니를 전해주고 견학도 없이 돌아갔다.
그 뒤로 타워의 유령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날 만났던 남자가 진짜 '어둠의 전사'였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년이 더 지난 뒤의 일이다. 어둠의 전사가 되찾아 주었다는 밤하늘을 동경한 나는 이름 따라 천문학자가 되었고, 레이크랜드의 천문대에서 근무하며 점성술을 익혔다. 우리는 분기에 한 번 성과 보고를 위해 타워를 방문해야 했는데, 우연히도 보고회 일정이 잡힌 회장에 영웅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거기서 그를 보았다. 영웅의 눈웃음과 기억 속 남자의 눈가에 패여 있던 눈주름의 모양이 같았다. 눈웃음의 결을 따라 깊고 길게 패인 주름. 그가 지난 세월 속에서 어찌나 웃었는지, 어찌나 행복했는지를 말해주는 캄캄한 음영. 끊어져 있던 필름 조각이 이어지는 것처럼, 수십 초 사이에 그날밤 겪었던 기묘한 일들이 스쳐갔다. 그에게 어린 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그가 진정 어둠의 전사라면 그런 무례쯤 애저녁에 웃어 넘겼으리라는 데 나는 며칠 전 수확한 레이크랜드 특산 왕살구를 걸 수 있었다. 애당초 세계를 넘어설 수 없는 이상 더는 방문하지 않게 된 그에게 감사를 전할 길도 요원하긴 했다.
이것도 한참 뒤에야 알게 된 거지만, 주박이 풀린 뒤 그가 사는 '세계'와 노르브란트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고 했다. 수십 년 전 일 메그에는 벌써 그 흐름을 예견한 현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름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달이 이상할 정도로 가깝게 뜬 밤이었다. 출입이 금지된 성견의 방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라이나 대장이 즉각 나를 호출했다. 하필이면 그 주는 천체 위치가 줄곧 관측해왔던 궤도와 조금 다르게 잡혀서 다들 난리가 나 있던 주였다. 관측 오류가 분명하다며 주변에서는 연구원들을 들볶았고, 덕분에 말단이었던 나는 격무에 시달렸다. 겨우 일을 끝내고 달려갔으나 늦었고... 그곳에서는 붉은 머리카락의 미코테족 소년과 아주 늙은 모습의 영웅님이 나타났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의 루트로 크리스타리움을 돌아본 뒤 처음 이 세계에 나타났던 날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진 모양이었다. 간발의 차로 재회의 기회를 놓친 내가 허탈해 있는데 라이나 대장이 다가왔다. 한참 말이 없던 그녀는 바구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낡은 액자였다. 받아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날처럼 주저앉고 만다. 구르는 소리가 나고, 나와 대장은 엇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둘 다 보아버렸던 것이다. 어둠의 전사와 수정공 둘 중 어느 쪽의 얼굴도 닮지 않은 붉은 머리 미코테족 소년의 초상화 아래, '니메이아' 라는 제목이 덩그러니 적힌 것을.
멜로망스 -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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