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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시계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립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라면 누구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보았을 겁니다.
 
오점이 있건 없건 정의는 정의.
 
오늘도 AOC의 요원들은 훌륭하게 지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던가요?
 
지긋지긋한 AOC와는 작별을 고했으니까요.
 
그것도 우리 손으로 직접 수뇌부를 터뜨려 놓았죠.
 
마지막으로 파트너와 짝! 하이파이브까지.
 
그땐 정말 짜릿했는데 말이에요.
 
...
 
돌아온 걸 환영해요, 그라하 티아.
 
먹고 살기 빠듯하다지만, 아직 두 사람의 일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얀 싸라기눈이 흩날리는 음울한 검은 숲.
 
이파리를 떨구고 빈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 위로 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습니다.
 
설원이라고 불러도 모자람 없는 넓은 공터.
 
메테오와 그라하 티아는 새하얗게 얼어붙은 바닥을 딛고 섭니다.
 
앞서 안부를 묻고 넘어갈까요.
 
‘안전지대 탈환 작전’으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간 잘 지냈나요?
 
두 사람은 지낼 곳을 찾아 한동안 방랑하기도 하고,
 
닥치는 대로 일감을 해치우거나,
 
곤경에 빠진 민간인들을 도우면서 셋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서로 일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죠.
 
통장은 못 쓰지, 생활비는 벌어야 하지,
 
거기다 추격은 추격대로 붙고!
 
건드리지 않은 아르바이트, 손대지 않은 용역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번 일감은 유독 위험했던 모양이에요.
 
불만스러운 얼굴의 파트너가 당신을 봅니다.
 
잠깐 인사해 둘까요?
 
메테오:이런 데 도서관이 있다고?
일감 받기 전에 확인부터 했어야지. 차라리 피시방에서 라면 끓이는 게 낫겠다.
 
그라하 티아:평범하게 생각해 봐.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피시방 알바보다 도서관 알바가 훨씬 더 안전할 거라 여긴다고. 안 그래?
어두컴컴한 데에서 눈이 시리도록 모니터 화면을 보는 것보단, 종이 냄새나 맡으면서 책 넘기는 게 낫지. 겸사겸사 읽고 싶었던 역사서도 보고....
그리고, 오는 걸음이 없을 때는 공부도 하고!
 
메테오:알았어, 다 좋은데... 주소는 확인했어야 할 거 아냐. 여긴 도서관은커녕 사람 하나도 안 살게 생겼는데.
공부하고 싶으면 학교 보내준댔잖아, 네가 싫다고 고집 부려 놓곤.
 
여전한 두 사람.
 
사이가 좋아지려면 한참 멀었네요.
 
그런데…
 
정말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거죠?
 
이런 숲속에 도서관이 있을 리 없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이유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전투가 시작되거든요!

 
당황하고 있을 시간 없어요. 클리셰 SF 세계관이란 원래 이런 식인걸요.
 
〔크리그어〕의 약식 크리쳐 대항 전투 방식을 빌립니다.
 
하던 대로 하면 돼요. 익숙하잖아요.
 
시작부터 과격하지만, 맞은 편에는 102마리의 크리쳐가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좀 많은가요?
 
그래도 오늘의 살상탄은 특별하니까 괜찮아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내내 해오던 일이잖아요.
 
최강의 인류, 최강의 크리쳐에게는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 난이도입니다.
 
img
 
눈앞으로 기묘한 형상의 금속형 크리쳐들이 달려들고...
 
최강의 크리쳐 그라하, 선공입니다.
 
그라하 티아:무, 뭐, 뭐, 뭐, 뭐야......?!
 
메테오:뭐긴 뭐야, 하루이틀도 아니잖아.
 
그라하 티아:......누가 몰라서 그래? 아무리 그래도 숲속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보단 놀랍다고!
그리고...... 징그럽게도 득실거리네. 뭐, 크리쳐인 내가 할 소리는 아닌가.
 
메테오:안 죽게 조심하기나 해. 머릿수로 밀고 나오면 방법 없다.
 
그라하 티아:이제야 사람이 된 그쪽이나 신경 쓰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등에 매달린 총기를 집어 꺼내든다. 동료의 말이 맞아, 하루이틀도 아니기 때문에 총기는 늘 닦아 두곤 했지. 앞을 내다보고 꼼꼼히 대비했다기보단, 이런 상황이 또 왔으면 하는 바람에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메테오가 알면 소리 좀 듣겠는걸. 다시 한 번 간다. 눈앞으로 쏟아지는 금속형 크리쳐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대 크리쳐 살상탄
기준치: 75/37/15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피해: 33
(바, 발사.......)
 
마음이 너무 앞서나갔나요?
 
탄창이 빈 총은 덜걱이는 소리를 내며 진동합니다.
 
메테오:그새 장전하는 법까지 까먹은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비웃듯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나도 나지만, 저 녀석도 사람 만들어 놓으려면 한참 고생해야겠군. 탄창을 채운 총을 장전하고, 틈을 노려 덤벼드는 무리 사이로 방아쇠를 당긴다.)
대 크리쳐 살상탄
기준치: 90/45/18
굴림: 98
판정결과: 실패
피해: 23
 
그라하 티아:...뭐라고 했어? 그새 장전하는 법까지 까먹은 놈?!
 
...여전한 두 사람이네요.
 
방아쇠가 헛돌고, 틈을 노린 크리쳐가 달려듭니다.
 
금속형 크리쳐:
금속 가시
기준치: 40/20/8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피해: 1
 
메테오:아, 아니, 젠장, 추워서 맛이 갔나...!
 
총기를 노려보던 파트너는 가볍게 공격을 피해냅니다.
 
돌아왔다는 실감이 드는군요. 변함없는 하루입니다.
 
다시 당신의 턴.
 
그라하 티아:맛이 갔다는 거... 총이 아니라 너 말하는 거지? (잘그락, 궁시렁거리면서도 푸른 빛을 반사하고 있는 대 크리쳐 살상탄을 손 안에 쥔다. 탄환은 최대한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던 것 같은데... 출처가 AOC 상사인지, 메테오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노리쇠를 움직여 탄알을 꾸역꾸역 장전한 뒤, 팔을 당겨 격발한다. 총의 반동으로 인해 앞머리가 공중에서 휘날린다.) 자꾸 늦장 부리면 첫 번째 명중은 내가 가져간다, 메테오!
대 크리쳐 살상탄
기준치: 85/42/17
굴림: 3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피해: 32
 
메테오:가져가든지. (불발한 탄환을 털어내고 빠르게 재장전한다. 전직 최강의 인류한테 이 정도는 추운 것도 아냐. 시끄럽게 투덜거리는 파트너의 발을 콱, 밟은 뒤 다시 조준점을 찾는다.)
대 크리쳐 살상탄
기준치: 90/45/18
굴림: 64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22
 
우지끈, 와장창!
 
뚝, 그리고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금속들이 나무를 긁고,
 
땅을 파헤치며 산산이 조각난 크리쳐가 천지에 뿌려진 별이 됩니다.
 
고통도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은 우는 대신 윤활유 따위를 흘리며 바닥을 더럽힐 뿐입니다.
 
메테오:반 이상 줄였으니 알아서 도망갈 거야. 탄환은 아껴두는 게 좋겠어.
 
그의 말대로입니다. 크리쳐의 습성이라면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여기까지는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입니다. 그러나……
 
어라?
 
크리쳐의 수가 반 넘게 줄었는데도 그것들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
 
끼익, 끼익.
 
끼이이익.
 
낡은 경첩이 흔들리는, 불길한 소리만 잿빛 하늘을 긁어댑니다.
 
무언가 이상하군요.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라하 티아:잠깐, 한눈팔지 마...! 저것들을 보라고!
(얼얼한 발로 그를 툭툭 찬다. 화낼 겨를도 없이 검지로 크리쳐들을 가리킨다.)
 
메테오:...도망가지 않는 건가? (멍한 눈으로 돌아본다. 이런 데서 살상탄을 계속 쓰는 건 낭비인데...)
 
두 사람이 위화감을 느끼는 순간,
 
부서졌던 기계가 다시금 재생합니다.
 
그라하와 메테오가 분명히 핵을 파괴했음에도 불구,
 
본체를 되찾은 것들은 아까와 똑같이 날카롭고 흉흉한 금속 테두리를 빛내고 있습니다.
 
그라하 티아:
SAN Roll
기준치: 85/42/17
굴림: 44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감소 없습니다.
 
“핵을 파괴하면 크리쳐는 사망한다.”
 
이토록 확실한 대전제가 무너지다니! 그 사이 크리쳐들이 진화한 건가요?
 
아니면 두 사람의 솜씨가 엉망진창으로 퇴화한 건가요?
 
글쎄요. 퇴화하긴 한 것 같지만... 그 정도일 리 없잖아요!
 
매끄러운 원기둥과 원뿔, 구로 이루어진 금속형 크리쳐는 날카로운 가시를 표면에 두르고 있습니다.
 
수은처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꿔가면서요.
 
불규칙하고 정형화된 모양새 사이, 핵은 분명히 새파랗게 빛나고 있습니다.
 
다시 부수는 게 좋을까요?
 
그라하 티아:...도망가지 않는 이유가 있었어. 녀석들, 재생하고 있잖아. 마치 알파의 소생처럼.
난 한적하게 책이나 읽으면서 돈이나 벌려고 했을 뿐인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메테오:설마 이런 곳에 알파형 크리쳐가 있을 리가... (인상을 구기고 총기를 들어올렸다.)
한 번 더 부숴보자.
 
그라하 티아:다른 수도 없으니 그래야지. 102마리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보단... 전부를 물리치는 게 더 간단하니까!
 
핵을 파괴한다면, 사격 판정.
 
그라하 티아:
사격(라/산)
기준치: 85/42/17
굴림: 55
판정결과: 보통 성공
 
금속 사이로 빛나는 푸른 핵을 노립니다.
 
겨울 하늘을 가르고 뻗어나간 탄환이 크리쳐의 핵에 적중합니다.
 
쾅!
 
폭탄이 터지는 듯 요란한 굉음과 함께 크리쳐가 나가떨어집니다.
 
부서진 파편 사이로……
 
그라하 티아:
관찰력
기준치: 80/40/16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어라. 저건 핵이 아닌 것 같은데요?
 
색과 모양새가 비슷하지만, 시계처럼 보이는 것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습니다.
 
일전의 핵은 하나의 구로 이루어져 있어 바로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정교한 부품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파괴하더라도 한 번에 박살내긴 쉽지 않아 보입니다.
 
메테오:우리가 알던 핵이랑은 다른 종류인 것 같다.
(턱을 쥐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소생하는 크리쳐가 백 마리나 몰려다닌다니, 들어본 적 없는 일이다.) 일단은 저것도 기계처럼 보이는데, 부숴 놓으면 말을 듣지 않겠어?
 
그라하 티아:그래, 상황 파악은 얼추 됐어. 그저 기본형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알파보다 허접인 크리쳐라고 보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알파인 나보다는 약골이라는 거지.
기계를 부숴 보는 건... 늘 하던 방식이 있었지!
가, 간다앗...!!
주먹!!!!
기준치: 65/32/13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3
 
...
 
펄쩍.
 
뛰어오른 당신이 핵을 향해 주먹을 내리치면,
 
달린 경로를 따라 발자국이 남고 흰 눈은 진흙이 섞여 온통 더러운 색으로 물듭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최강의 크리쳐!
 
그라하 티아가 핵을 박살내는 순간!
 
메테오:멍청아, 몸부터 들이대면 위험하잖아!!
 
긴 이명이 들리고,
 
째깍,
 
심장이 쿵쾅거리더니,
 
째깍,
 
메테오:그라하!!
 
째깍,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째깍,
 
눈앞이 핑 돌며……
 
딸깍.
 
불 끈 거 누구야?!
 

 
 
폐부에서부터 강한 압력이 치솟고, 이내 거센 기침 소리와 함께…
 
어떤 덩어리가 목구멍을 열고 왈칵 쏟아집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은 눈밭에서 눈을 뜹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을 듯한 겨울날의 추위 속,
 
회색 하늘 위로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송이들.
 
심장은 여전히 정신없이 쿵쾅쿵쾅 날뛰고,
 
끔찍한 비린내에 머리가 아픕니다.
 
불쾌한 기분에 팔이나 다리를 움직여보면, 전부 멀쩡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꽤 익숙한 광경이지만... 어딘가 다르군요.
 
그라하 티아:......,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동반된다. 머리를 통째로 조각내는 듯한 두통, 혀를 마비시키는 피 비린내. 그리고...... 곁에 누군가가 없다는 불안정한 마음까지. 춥지만 살갗이 데인 것처럼 뜨겁다.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 무슨 일이....)
메, 메테오? (응어리가 진 무언가를 옆으로 토해낸 뒤에야 목을 움켜쥔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 평소와 다른가?)
 
주위에는 온통 눈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무 한 그루는커녕 시야를 들고, 들어도 끝없이 펼쳐진 설원이 전부입니다.
 
아까 그곳에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진 거죠?
 
바람의 냄새가 전혀 다릅니다. 훨씬 건조하고 차갑습니다.
 
메테오를 불러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눈밭에 파묻히기라도 한 걸까요? 최악의 상황이라면 폭발에 휘말려 흩어지고 말았을지도요.
 
...목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옵니다.
 
당신이 토해낸 것은 다름 아닌 시계입니다.
 
금속 재질로 은색을 띠고 있으며 내부에 든 것은 새파랗게 빛나는 점액질과 복잡다단한 태엽들.
 
크리쳐의 핵과 똑같이 생겼군요. 작동을 멈춘 모양입니다.
 
그라하 티아:(얼어붙은 눈이 앉은 눈꺼풀을 껌벅거린다. 언제부터 누워 있었던 거지. 그래, 분명 괴상한 크리쳐를 박살낸 이후로 단순한 사고가 발생한 거야. 멍한 얼굴로 결론을 내리던 그 순간, 고개를 돌리자 목을 타고 나온 물체가 시선에 들었다. 가늘게 앞을 바라보던 눈이 크기를 더해가며 번쩍 뜨인다.) ...이, 이게.......... 이게 뭐야?!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등으로부터 새하얀 눈이 후드득 떨어진다. 무거운 머리를 움직여 주위를 확인한다.) 길이라도 잃은 거야, 뭐야... 어디 갔어, 메테오!
 
공허한 목소리가 설원을 울립니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등에 묻어 있던 눈가루가 떨어집니다.
 
파트너는 여전히 대답이 없고... 위화감이 듭니다.
 
붉은 패딩 위로 눈가루가 묻어납니다. 입고 나왔던 코트는 어쩌고 이런 차림인지 모르겠습니다.
 
거기다 몸에 꼭 맞는 회색 스웨터까지.
 
어쩐지 낯익은 복장이기도 한데……. 날이 춥네요.
 
그라하 티아:
건강
기준치: 70/35/14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귀는 먹먹하고 심장은 쿵쿵 뛰는 데다 머리까지 어지럽습니다.
 
속은 메슥거리고요.
 
추위가 얇은 옷 사이로 스며들어서 오한과 소름이 오소소 돋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배까지 고프네요. 분명 점심을 먹고 나왔던 듯한데...
 
체력이 1점 감소합니다.
 
왜 추위를 느끼는 걸까요? 고통은 왜 이렇게 날카로운 걸까요?
 
AOC의 요원이 된 후, 강도 높은 훈련을 거치며 이런 감각에는 무척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심지어 최강의 크리쳐가 되어버린 후로는 더더욱이요.
 
이상함을 느껴도 딱히 짐작 가는 구석은 없습니다.
 
음, 일단 메테오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라하 티아:(작동도 안 되는 고물, 웩, 끈적하기까지 해서 구역질 나는 장치.... 이거 시계라고 불러도 되려나. 시계를 재빨리 채서 손에 들고, 삐그덕거리는 전신을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두 발로 눈밭을 딛고 선 후에야 훌쩍, 하고 코를 들이켰다.)
우선 동료를 찾자. 그래야 여기서 비명횡사라도 안 하지. (혼자 남으면 혼잣말이 늘어난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발을 내디뎌 새하얀 벌판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를 찾기 위해 정처 없이 걷기로 했다. 이것보다 훨씬 따뜻하고 포근했던 코트도 찾는 겸.)
 
눈밭 위로 당신의 발자국만이 이어집니다.
 
그라하 티아:
관찰력
기준치: 80/40/16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몽롱한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끝모르고 하얀 벌판.
 
메테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한참을 걷다 보면, 저 아래 얼어붙은 호수가 보입니다.
 
당장의 허기부터 해결해야 하니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라하 티아:(......더는 못 참겠어. 배고파, 배고파, 배고프다고! 퇴사를 한 것까지는 좋았어. 그런데, 밥을 먹지 못하는 게 이렇게까지 진절머리 나는 건지는 몰랐다고. 이러다가... <최강의 인류 사망, 열심히 규명해 보니 사인은 배고파서>라는 기사가 뜰지도 모르는 일이야.)
...메테오... 낚시를 좋아했지.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지만.
(변함없던 풍경의 사이로 호수가 드러나자, 홀리듯 그쪽 방향으로 걸음을 이끌었다.)
 
어째서인지 파트너의 취미가 떠오릅니다. 자리를 잡고 나면 함께 낚시하러 가기로 했었죠.
 
이런 겨울 호수에서 물고기가 낚일지는 모르는 일입니다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얼어붙은 호수까지 내려가는 내내, 세상은 고요하고 희디흽니다.
 
매서운 바람 소리만 귓가를 때립니다.
 
추위에 민감한 붉은 귀가 아픈 것도 같습니다.
 
생명체 하나 보이지 않는 눈밭에는 크리쳐 특유의 작동음이나 인기척도 들리지 않습니다.
 
눈은 높이도 쌓여 무릎까지 푹푹 빠집니다.
 
그것들을 헤치고 걷자니 유난히 사지가 무겁고 축축 늘어집니다.
 
바지와 운동화도 축축하게 젖어버려서 불편하고요. 물기가 든 스웨터는 엉망입니다.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려가면……
 
얼어붙은 호수의 테두리에 닿습니다.
 
표면은 단단하게 얼어, 낚시는커녕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호수 건너편 저 멀리에 검은 숲이 펼쳐져 있습니다.
 
검은 숲을 향해 하얀 눈길이 이어집니다.
 
가로질러 갈까요? 에둘러 돌아가는 것이 나을까요?
 
그라하 티아:윽, 제대로 얼어 있잖아... 당연한 얘기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가다가 눈이 얼마나 차오를 줄 알고.
(그리고 건너편에 보이는 숲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아. 얼음 표면 위로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엉거주춤 움직이면서 되뇐다. 나는 최강의 순발력을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다...)
 
최강인 당신, 호수를 가로지르기로 합니다.
 
이만큼이나 단단히 얼어 있으니 깨질 일은 없겠죠.
 
깨지더라도 최강의 순발력이라면 사고는 없을 테고요.
 
호수 표면은 얼음 특유의 결이 생생합니다. 꽤 깊게 언 모양입니다.
 
얼음에 비친 당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상당히 앳된 얼굴이네요. 지금의 그라하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순간.
 
콜록!
 
생각을 방해하는 것은 낯익은 기침 소리입니다.
 
뒤를 돌아보면 내려오던 반대 방향으로 둥글게 솟은 눈무덤이 있습니다.
 
그라하 티아:......?
누, 누구야?
(민간인이 이런 데에 있을 리가 없는데. 메테오인가? 몸을 돌려 걸음을 빨리한다. 숨이 가쁘도록 저멀리 보이는 눈무덤을 향해 달린다.)
 
덮인 눈은 딱 사람 하나를 묻을 만한 크기입니다.
 
가쁜 숨, 절반의 기대.
 
당신이 필사적으로 눈무덤을 헤집으면 그 안에 쓰러진 것은…
 
뺨이 차갑게 얼어버린 메테오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메테오지만 메테오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앳된 얼굴. 그리고…… 익숙한 군복.
 
AOC의 군복을 입고 있는 메테오는 대 크리쳐용 살상 무기를 쥔 채 눈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다행히 미약하나마 숨이 붙어 있군요.
 
그라하 티아:일어나, 바보야!
이쪽은 한참 전에 일어났다! (그의 멱살을 쥐고 조금 들어올린 후, 반대쪽 손으로 뺨을 친다. 손바닥으로 툭툭 건드리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반질반질한 뺨을 두드려보아도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 눈 속에서 쓰러져 있었던 걸까요?
 
아무리 흔들고 깨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지가 시체처럼 차갑습니다. 우선 몸을 데울 만한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라하 티아:......수, 수염이 없어....
...이럴 때가 아니지. 이러다 정말 죽겠어. (그건 곤란하다고. 몸통을 거칠게 끄집어 올린다. 그 과정 중 그가 지닌 살상 무기가 눈에 띈다.)

 
툭,
 
당신이 그를 들어올리는 순간, 품에서 대 크리쳐용 소총이 떨어집니다.
 
전직 군인인 당신은 그것을 보는 순간 직감합니다.
 
이건 현재 보급되는 무기가 아닙니다.
 
몸체에 쓰인 모델 넘버는 A-O31-C1015.
 
……약 4년 전에 사용하던 구형입니다.
 
낡은 스웨터와 패딩. 해진 운동화마저 어쩐지 낯익습니다.
 
앳된 얼굴의 두 사람은 아무리 봐도 조금 전과는 다르고,
 
무기의 연식은 분명히 수 년 전의 것입니다.
 
감이 좋은 당신이라면 눈치챘을 테죠?
 
……과거로 타임리프한 그라하,
 
그라하 티아:
SAN Roll
기준치: 85/42/17
굴림: 52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감소 없습니다.
 
[4년 전 이야기]를 입수합니다.
 

 

 
수 년 전 일이기에 기억이 온전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떻게 잊겠어요.
 
두 사람의 첫 만남이기도 할뿐더러 뼈에 사무치는 추위였는걸요.
 
기억을 가다듬을 필요도 없이 이 다음 일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커다란 동굴이 있습니다.
 
겨울에 먹을거리가 모자라 사냥을 나오게 되면 사용하던 쉼터이기도 했었죠.
 
그때 분명히, 메테오를 이고 져서 그 동굴로 향했습니다.
 
추위를 피하고 불을 때고…….
 
그렇게 간신히 메테오를 구하고,
 
다른 AOC 요원들과 합류해서 Z시의 피난민을 보호, 이송했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기억을 대체 왜 잊고 있었담?
 
X시에 무사히 도착하며 터지던 안도의 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느꼈던 짜릿한 안도의 감각.
 
당신이 AOC에 입대하겠다고 결심한 계기였을 수도 있겠죠.
 
자, 그라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오늘의 당신은 AOC를 동경하던, 4년 전의 순진한 이가 아닙니다.
 
얼음송곳 같은 눈발이 흩날리고,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칩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몸은 당신이 구하지 않는다면 얼어붙은 설원에 버려진 채 시체가 되겠지요.
 
최강의 인류라는 명성이 애석하게도 무덤 하나 없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
 
하지만 적어도,
 
최강의 크리쳐니 뭐니 하는…
 
끔찍한 실험의 희생자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라하 티아:(바보같이...... 잊고 있었어. 고작 4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맞아, AOC에 입사하게 된 건 분명 그와 함께 했던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내보인 근사한 구조 활동 때문이었는데. 위급한 상황에서도 모두를 지켜내는 등이 멋있었어. ... ...)
(......그렇다면, 난... 4년 전으로 타임리프를 해버린 거야?)
(당시에 이 꼬질꼬질한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뭐야, 이 전형적인 클리셰 같은 전개는?!)
(난 크리쳐한테 주먹을 날렸을 뿐이라고. 그랬더니 시계를 토하고, 멀끔해진 얼굴의 메테오를 만나고. ...됐다.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도 지금 상태로는 무리야. 서둘러 그를 옮겨야 해.)
(전신을 숙여 그를 등 뒤에 두고, 업어 올렸음에도 뒤쪽을 보자 두 다리가 땅바닥을 끌고 있다.) 넌 여기서 죽을 사람이 아니야.
(그대로 왼쪽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요.
 
당신은 그를 두고 갈 수 없습니다.
 
가시밭길에 구르더라도 살았으면 하는 게 파트너인걸요.
 
바람이 스칠 때마다 피부가 갈라지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최강의 인류도, 최강의 크리쳐도 되지 못한 신체는 연약하기 짝이 없군요.
 
들쳐 멘 남자의 무게가 자꾸만 무릎을 꺾습니다.
 
그럼에도 살리고 말겠다.
 
이런 곳에서 끝나게 하지 않겠다.
 
집념만으로 추위를 헤쳐나갑니다.
 
하여간 내버려 둘 수가 없는 파트너입니다! 깨어나면 한 마디 해 주도록 해요.
 
몇 발짝 떼지 못하고, 군장의 무게와 체중에 다리가 휘청입니다.
 
그라하 티아:
건강
기준치: 70/35/14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대체 뭘 먹었길래 이렇게 무거운 걸까요?
 
...아뇨. 그가 무거운 게 아니군요.
 
민간인의 몸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체력 1점 감소합니다.
 
계속해서 왼쪽을 향해 나아갑니다.
 
기억을 따라 걸어도 동굴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땐 분명 얼마 걷지 않았던 것 같은데. 추억의 미화일까요?
 
정신을 잃은 메테오는 갈수록 무겁고 걸리적거리기만 합니다.
 
아, 그냥 버리고 가고 싶다…….
 
난 크리쳐한테 주먹을 날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렇게 생각했던가요?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커다란 동굴의 입구가 보입니다.
 
저기라면 눈과 바람을 피할 수 있을 거예요.
 
바닥이 좀 딱딱하겠지만 설원에 눕는 것보단 훨씬 호사스럽겠죠.
 
그라하 티아:(이거 뭐 추억 여행도 아니고. 그를 질질 끌어내듯 무거운 다리를 옮기며 짧게 씩씩거린다.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던가? 내 몸에 크리쳐 세포가 사라져서 더 힘들게 느껴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선다. 깊게 숨을 토해내는 것과 함께 동굴의 바닥에 메테오를 눕혀두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고.)
 
동굴 내부는 생각보다 어둑하고 서늘합니다.
 
벽에는 꺼진 횃불이 걸려 있고, 짐승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높은 곳에 선반이 설치돼 있습니다.
 
모포난로와 비상식량 따위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라하 티아:...휴.
여기, 굉장히 오랜만이네.
(4년 전이라면... 분명히. 아, 여깄다.)
(막 성인이 된 김에 가지고 다녔었지, 라이터. 패딩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끝에 네모난 형체를 꺼낸다. 자연스럽게 불을 내서 횃불을 밝히고, 구석에 놓인 발받침대를 끌어 뒷걸음질한다.)
(선반 아래에 받침대를 두고 올라선다. 손을 올려 선반 위를 더듬는다.)
 
낡은 양은 냄비가 손에 잡힙니다.
 
이걸로 음식을 끓일 수 있겠어요.
 
그라하 티아:(냄비를 쥐고 맨바닥으로 가볍게 뛰어내린다. 틱, 다시 한 번 라이터를 켜서 난로에 불을 넣고, 그 위로 어설프게 냄비를 고정했다. 빨리 동굴 안이 따뜻해지면 좋겠는데.)
(모포를 끄집어 메테오의 차가운 몸 위로 덮어 두었다. 이마에 손을 얹어 체온을 잰 뒤에 결론을 내린다. 이 정도면 일어나서 뭘 먹어도 상관없는 컨디션이라고.)
 
당신의 정성에도 메테오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저체온증이 확실해 보이네요. 체온이 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구식 간이 난로에서 열기가 피어오릅니다.
 
불이 붙은 횃불 덕에 차츰 내부가 밝아지고, 난로를 켠 덕에 추위도 한결 가십니다.
 
물론 민간인의 몸은 아직 으슬으슬 떨리긴 하지만…… 배까지 채운다면 좀 나아지겠죠.
 
젖은 옷으로 모포를 덮고 누운 파트너가 가쁘게 호흡합니다.
 
옷이 젖어서일까요? 맥박이 요동치고, 꼭 나쁜 꿈을 꾸는 것처럼...
 
안 되겠어요. 이럴 때를 대비해 AOC에서 배운 게 있었죠.
 
심폐소생술 말이에요.
 
그라하 티아:...젠장. 일어나라니까.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침착하게 머리를 굴린다. AOC에서의 경험이 없던 예전에는... 좀 더 당혹스러워했던 것 같기도 한데. 대체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났던 거람.)
(손꿈치를 그의 흉부 위로 올린다. 반대쪽 손으로 손등을 포개고, 팔을 쭉 뻗어 수직으로 힘을 가한다. 쿵, 쿵, 쿵. 실습 시간에 배웠던 그 정확한 간격으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입으로 '하나'부터 수를 세어간다.)
('스물'이 지날 때부터 마음이 다급해져갔다. 쉽게 의식을 차리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약한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간만이라서.)
(가슴압박을 마치고 그의 이마를 눌러 머리를 젖히게 만든다. 동시에 손끝으로 턱을 눌러 얼굴을 비스듬히 눕히게끔 조성한다.)
(코를 잡은 채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술을 겹쳐 기도 안쪽으로 숨결을 넣었다. 가늘게 눈을 뜨고 그의 의식을 확인했다. 일어나, 메테오.)
 
입술이 맞닿습니다.
 
수염이 없어서인가, 생각보다 부드러운 입술입니다.
 
이렇게 유약한 모습의 파트너라니. 항상 보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군요.
 
숨을 나눠주고, 불을 때우고 나면…
 
맥박을 되찾은 그의 뺨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의식을 찾으려면 아직인지, 나른하게 잠들어 있네요.
 
메테오가 눈을 뜨기 전에 한번 상황을 정리해보는 게 좋겠어요.
 
...입을 맞추었다는 걸 들켜서도 큰일이니까요.
 
오늘 낮, 당신은 분명히 숲에서 크리쳐와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핵을 부숴도 되살아나는 변종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됐죠.
 
핵의 부품을 흩어 놓기 위해 손에 쥐는 순간…… 요란한 초침 소리와 함께 암전.
 
그 다음은 4년 전의 어느 겨울날.
 
핵을 쥐는 순간 신체 내부에서 격렬한 반응이 일었던 것으로 보아,
 
크리쳐 간의 무언가가 공명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당신이 토해낸 시계는…… 크리쳐의 핵일 겁니다.
 
어떻게 해야 원래 시간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늘은 어디 있는 걸까요? 아직 뱃속에?
 
마저 토해내서, 합체해야 돌아갈 수 있다거나?
 
보글보글.
 
타닥타닥.
 
깜빡깜빡.
 
사나운 눈보라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용하고 얌전한 효과음이 동굴 안을 채웁니다.
 
...
 
잠깐.
 
...무언가 이상한 의태어가 섞이지 않았나요?

 
HOPE:......뭐야?
 
눈을 뜬 메테오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은 수많은 의문 중 하나의 답을 얻습니다.
 
그는 4년 전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HOPE:그쪽이 저를 구했습니까?
 
어떻게 된 거죠?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이상합니다.
 
그라하 티아:
지능
기준치: 90/45/18
굴림: 49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당신은 깨닫습니다.
 
[4년 전 이야기?]를 입수합니다.
 
...
 
4년이 아닙니다.
 
그렇게 뻔할 리가 없잖아요.
 
눈앞의 그는 5년 전의 청년.
 
당신이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와 당신이 처음 만나고, 파트너가 되고, 도시를 구하고,
 
세계와 인류를 구해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함께했던 지난 일 년의 추억,
 
맞이해야 했던 비참한 이별까지도요.
 
흩날리는 눈발과 회색 도시.
 
눈보라.
 
겨울.
 
크리쳐인 그와 인간인 당신.
 
죽어가는 그와, 살아갈 당신.
 
기이한 일입니다.
 
상실 직후 이어지는 재회.
 
우연이라기엔 지극히도 잔인합니다.
 
그가 말했던 ‘내일’이란 이런 것이었을까요?
 
...지금의 그로서는 모를 일이겠지요.
 
어쨌거나 이미 발생한 일을 뒤집거나 바꾸는 것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릅니다.
 
우선 식사부터 해 두기로 해요.
 
낡은 냄비에서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납니다.
 
그라하 티아:가, 가지 마.
(저를 구했습니까, 라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만다. 답지 않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조우했다.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만져보았다. 가루와 달리 제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것이 비록 클리셰 SF 영화 주인공의 비참한 말로라고 해도.)
(...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메테오는 그렇게 쉽게 갈 사람이 아니었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총을 들던 것도, 악바리처럼 갖가지 알바로 돈을 모으던 것도, A시와 Z시를... 세계를 구원해내는 것도. 모두 그였단 말이야.)
(웬 동문서답이냐며 이쪽을 쳐다보는 그에게서 손을 거둔다.)
(말없이 냄비를 향해 턱짓했다.) 먹는 거 좋아하잖아.
 
HOPE:…...괜찮습니까? 무슨 일이에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는.
(작게 기침을 했다. 가지 말라니, 이런 몸으로는 움직일 수도 없겠는데.)
아, 내가 할 말이 아닌가.
(소년의 절박한 표정과 스스로의 끔찍한 몸상태, 대충 알 만했다. 고개를 무겁게 돌려 동굴 내부를 둘러본다. AOC 군복을 입은 사람을 발견한 민간인에게선 자주 볼 수 있는 절박함이었지. 이 소년도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정신을 차린 내가 훌쩍 자리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런 말을... ...아마도.)
(턱짓을 따라 시선이 돌아갔다. 이 녀석, 작은 몸집에 허여멀건 낯짝, 어려 보이긴 하는데... 말을 놔도 되는 건가?)
맞아, 좋아해.
 
HOPE:(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구해주었다는데 날을 세울 이유는 없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는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넌 민간인... 으로 보이는데. 혹시 네가 구조신호를 보냈나?
 
그라하 티아:(이쪽을 향하는 미소에 싱긋 웃었다. 시계보다도 훨씬 더 둔탁한 것이 목으로 밀려드는 것 같았지만, 애써 삼켜낸 뒤 몸을 돌려 일어난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벗어나 바람처럼 흘러갔다. 손길이 닿는 대로 식량의 상태를 확인한다.)
구조 신호는 아직이야. 네가 눈에 덮여 있길래, 피난처로 삼을 만한 장소에 데려온 거지.
민간인이라고 남 돕지 않는 법이라도 있나? 거기서 기다리기나 해.
 
HOPE:그렇군, 신호를 보낸 건 네가 아니었던 건가...... 신세를 졌어. 고맙다.
네가 발견해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얼어죽었을 거야. 정신 차렸다고 매정하게 가버리진 않을 테니 안심해.
 
그렇게 말하며 메테오가 헛기침을 합니다.
 
가지 마.
 
그 말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에요. 이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파트너란.
 
비상식량을 확인해보면 동결 건조 수프, 레토르트 함바그, 육포와 초콜릿 바 조금이 남아있습니다.
 
그라하 티아:...구조 신호가 온 거라면 위치는 알고 있어? (건조 수프를 주욱 뜯어 굳어 있는 덩어리를 냄비 안에 넣는다. 그리고, 제대로 밀봉되어 있는 레토르트 함바그를 그를 향해 던진다.)
 
HOPE: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 근처였던 건 확실한데, 날이 흐려서 주파수가 튀는 바람에... 어엇!
(안면으로 날아오는 식량을 간신히 잡아챘다. 뭐야, 이 막무가내는?)
갑, 갑자기 던지면 놀라잖아. ...이런 데 함바그가 다 있네.
 
그라하 티아:최강의 인류가 그 정도는 잡아야지. 뭐, 가끔 나무에서 떨어질 때도 있기는 했지만....
(식량 더미를 흘겨보며 눈동자를 굴린다. 마실 건 없나?)
 
HOPE:......놀리지 마, 이쪽은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고.
 
그라하 티아:
기준치: 60/30/12
굴림: 4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선반 구석에서 캔에 담긴 사과 주스를 발견합니다.
 
날이 추운 덕에 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운이 좋았네요.
 
그라하 티아:(사과 주스는 왼손에, 냄비는 오른손에, 육포와 초콜릿 바이에는 턱 아래에. 그의 앞으로 식량을 가져와 바닥에 앉았다. 차례대로 바닥에 내려두며 그를 바라본다.) 사정이라니, 뭔데?
 
HOPE:(음식을 보자 눈이 맑게 풀어졌다. 초콜릿 바를 뜯어 입 안 가득 욱여넣는다.) 그게...
(몇 입 씹지도 않고 포장지만 남은 것을 네 패딩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큼, 그 전에 통성명부터 하자. 나는 HOPE… 아니지, 이건 코드네임이고.
 
그라하 티아:...윽.
 
HOPE:이름은 메테오야. 보다시피 AOC 소속이고… 크리쳐 상대를 전담하고 있어.
너는?
 
그라하 티아:(튀어나와 있는 꼬깃한 포장지를 내려다보며 입을 달싹인다.) 그라하 티아야.
......이걸 모르는 척해 줘야 하나.
 
HOPE:미안, 그래도 바닥에 버리면 안 되잖아. (능청스럽게 웃고는 함바그를 뜯어 수프가 끓는 냄비 안에 담갔다.)
이번에는 Z시의 피난민들을 구출하는 임무 중이었는데, 복귀하는 길에 갑자기 구조 신호로 추정되는 신호가 무전에 잡혔어. 그래서 소수 인원으로 찾으러 나섰다가...
(육포를 마저 뜯어 씹기 시작했다. 배를 채우니 살 것 같군.)
눈이 워낙 심해서 잠깐 헤맨 사이 낙오된 것 같다. 원래 민간인들에겐 알려주면 안 되는 정보지만, 목숨을 빚졌으니 이 정도는 말해줘도 되겠지.
 
그라하 티아:숟가락은 함바그랑 같이 밀봉되어 있어. (무릎을 굽히고 그 위로 턱을 얹었다. 묵묵히 비상 식량을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들어보니 A시 탈환 작전과 비슷한 상황인가. 생각을 마치고 말을 이었다.) 그 말대로 나는 민간인이지만 말이야.
내가 너보다 유능하고 똑똑하고 강할걸? 적어도 지금은.
 
HOPE:...그래? (포장지에서 일회용 스푼을 떼어낸다. 수프에 담긴 함바그를 떠먹다가, 고개를 든 순간 눈이 마주쳤다. 완전히 허풍은 아닌 눈치군.)
하긴, Z시에 남은 생존자라면 보통내기는 아니겠지. 날 여기까지 옮겨 온 것도 그렇고.
그래도 배는 고플 거 아냐? (스푼을 내려다보더니 네 손에 쥐여 주었다.)
너도 먹어둬, 여길 나가면 한참 걸어야 할 테니까.
 
그라하 티아:(옮겨오는 건 조금 삐끗했지만. 스푼을 어색하게 받아든다.) 전부 네가 먹어도 좋은데...
(꼬르륵, 배에서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가 동굴 안을 채웠다.)
(그 순간 허겁지겁 수프를 떠서 입안에 욱여넣었다. 목으로 음식을 삼키던 중 눈앞이 뿌얘진다.)
 
급하게 음식을 삼키는 당신을 보며 메테오는 다시 웃음을 터뜨립니다.
 
HOPE:맛있지? 이런 맛인 줄 몰랐는데... ...좋아하게 될 것 같네.
 
사실 동결 건조 식품이란 그저 그런 푸석푸석한 맛입니다만…
 
눈이 쌓인 풍경을 두고 그와 먹는 레토르트 함바그의 맛은 특별하게도 느껴집니다.
 
비록 고대하던 생선 구이는 아니지만요.
 
그라하, 체력을 1 회복합니다.
 
최강의 인류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메테오의 회복력은 가히 놀라울 정도입니다.
 
꽁꽁 얼어서 괴사를 걱정해야 했던 피부는 금세 핏기가 돌고,
 
뻣뻣하던 손끝은 부드럽게 짐을 움켜쥡니다.
 
허기를 해결하자마자 메테오는 동굴 가에 섭니다.
 
HOPE:해가 지면 기온이 더 떨어질 거야. 선발대를 따라잡기도 힘들어질 거고…
 
바깥을 살피면 인기척은 들리지 않고…
 
블리자드는 지나갔지만 바람은 여전히 흉흉해서, 눈이 내리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인 수준입니다.
 
HOPE:밤길에 크리쳐라도 마주치면 큰일이니까, 이만 출발하자.
 
상황을 보던 그가 앞장섭니다.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조끼 옆주머니에서 로프를 꺼내 당신의 허리에 묶습니다.
 
HOPE:잠깐...
팔 들어봐, T자로.
 
그라하 티아:알았어. (순순히 응하여 양팔을 넓게 올렸다.)
이건... 길을 잃지 않으려고 묶는 건가?
 
HOPE:맞아. 언제 다시 눈보라가 칠지 모르니까... 풀지 말고 있어.
 
그라하 티아:걱정 마. 손이 얼면 풀고 싶은 마음도 사라질 테니까.
 
HOPE:더 챙길 건 없지? (허리의 로프와 자신의 유니폼에 달린 링이 단단히 이어진 것을 확인했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매듭이 묶인 부분을 확인차 당겨보기도 한다.)
일단 너는 민간인 신분이고, 내 임무는 생존자 구출이라 말이야.
조금 답답해도 참아.
 
이놈의 과보호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군요.
 
...
 
준비가 되었다면 출발할 시간입니다.
 
그라하 티아:준비됐어, 메테오.
혹시라도... 가다가 몸에 이상이 있으면 얘기해야 해!
 
HOPE:알았어, 구조를 하고 있는 건지 당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유쾌하게 받아치며 짐가방을 들쳐 멨다. 돌아서는 순간, 무언가 어색함을 느끼고 멈칫한다.)
(저 녀석, 밥 먹기 전에도 저렇게 눈가가 발갰던가?)
 
식사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는 알아채지 못했을 겁니다.
 
당신이 어떤 기분으로 수프를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는지도요.
 
그라하 티아:(끈이 느슨해지도록 그의 뒤를 향해 몇 걸음 나아갔다가,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든다.) 왜 그래?
 
HOPE:...아, 아무것도 아냐.
(너무 쳐다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뒷목을 긁다가 만다.) 가자.
 
그라하 티아:(입에 수프라도 묻었나. 얼굴을 두어 번 더듬은 후에야 끄덕인다.)
 
동굴을 나선 두 사람은 한참을 걸었습니다.
 
눈이 멀 정도로 하얗고 평평한 설원이 이어집니다.
 
아무래도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HOPE:일단 AOC 작전 본부로 갈 거야.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Z시 안에 계속 있는 건 위험하니까.
...그건 그렇고, 넌 어쩌다 여기 남은 거지?
 
그라하 티아:어... 어쩌다 보니.
... ...
눈밭에서 조깅 좀 하다가 너를 본 거야!
 
HOPE:오, 조깅? 운동을 좋아해?
 
오늘의 파트너는 한층 더 둔감하게 굽니다.
 
그렇게 감이 좋았던 동료인데, 얄궂은 일이네요.
 
HOPE:강한 데다 운동까지 좋아한다면... 너도 이 김에 AOC에 지원해 보는 게 어때? 작전 본부에서 입단 신청을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라하 티아:그런 셈이지. ...말은 고맙지만, 천천히 고려해 볼게. 그보다...
AOC 지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남는 총 없어?
왜, 네가 말했잖아. 크리쳐를 마주칠 수도 있다고.
 
HOPE:총이라고? ...아, 아아. 대 크리쳐용 무기를 말하는 거군.
미안하지만 대 크리쳐용 무기도 군용 보급품의 일종이라, 민간인에게 양도할 수는 없어.
그 전에, 남는 게 없기도 하고.
(가슴팍에서 덜렁거리는 소총을 툭툭, 건드려 보였다.)
크리쳐가 나타난다면 내가 이걸로 어떻게든 할게. 너무 걱정 마. 난 이래 봬도 최강의 인류거든.
 
그라하 티아:에이. 내가 총에 좀 빠삭하거든. 그거 A-O31-C1015잖아. 흠, 좀 더 다듬을 필요는 있어 보이네. 갈론드사도 아직 멀었다니까.
꽤나 혁신적인 발견이었지. 생체형 크리쳐한테도 잘 먹혀 들어가고. 또......
...큼, 큼. 어... 학교에서 배웠어.
 
HOPE:.........
 
메테오의 입이 떡 벌어집니다.
 
민간인에 불과한 당신이, 대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냐는 표정입니다.
 
HOPE:너... 정체가 뭐냐?
그, 그건가? 총기나 군수 물품만 전문으로 캐고 다닌다는, 그... 밀리터리 매니아?
 
그라하 티아:아니거든! 고작 그런 분야만 면밀히 탐구하는 게 아니라, 그 총기는 네가 사용하던 거라... ... ...!!
(끝맺지 못한 말이 허공에 퍼진다. 부풀린 꼬리털을 다시 눕히고, 됐다,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지속한다.)
...호신용 무기라도 나중에 주던가 해.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지.
 
HOPE:......뭐? (벙찐 얼굴로 눈만 끔벅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엉뚱한 소리만 하잖아.)
(그러다가도 부푼 꼬리를 볼 때면 웃음을 터뜨렸다. 상부에선 최강의 인류라는 이미지를 그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팔아먹기도 했었으니까.)
(AOC를 동경하는 모양이지. 실상이 어떤지를 안다면 기절하겠군.)
(입고 있던 조끼 앞주머니를 더듬거린다.) 으음, 원래 잭나이프 정도는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는데... 미안해. 기절해 있던 사이에 잃어버린 모양이다.
위험한 일은 없게끔 할 테니 안심해. 정 욕심이 난다면 정식으로 입대 신청을 하는 것도 방법이고.
 
그는 사뭇 진지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정말 당신이 입대하기를 바란 걸까요?
 
빈말은 아닌 모양이지만... 기억 속의 메테오는 남을 조금 더 경계하는 성격이었는데 말이죠.
 
그나저나, 아까부터 계속해서 같은 곳을 돌고 있는 것 같아요.
 
이대로는 해가 저물기 전까지 작전 본부는커녕 설원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할 겁니다.
 
파트너(아직 아니지만!)에게도 마땅한 수는 없어 보이는데요…
 
그라하 티아:
관찰력
기준치: 80/40/16
굴림: 50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당신의 눈에 무언가 들어옵니다.
 
눈에 파묻힌 나뭇가지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을 법한 위치의 나뭇가지 하나만 왼쪽으로 꺾여있습니다. 이게 뭐죠?
 
그라하 티아:메테오, 여기 봐.
이거... 꽤나 부자연스럽게 부러져 있네.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꺾은 것처럼.
네 동료들이 일부러 표시해 둔 거 아니야? 작전 본부에서 내린 지침이라거나. 요즘은 어떤지를 모르겠군.
 
HOPE:(나뭇가지에 다가가 꺾인 방향을 살핀다. 환하게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동료들이야. 후발 부대를 위해서 길을 표시하게끔 하고 있거든.
...본부 지침인 것도 맞고. 넌 정말 정체가 뭐냐? 이런 신호 체계까지는 바깥으로 알려지면 안 되는데.
 
그는 반가우면서도 미심쩍어하는 눈치입니다.
 
HOPE:아냐, 어느 쪽이든 좋아. 너 같은 녀석이야말로 AOC에 꼭 필요한 인재다.
내가 부대장님께 잘 말씀드려 볼게. 같이 인류를 지키자!
 
그라하 티아:...알려지면 안 된다면서, 나한테 그대로 토로해버려도 되는 거야?
아무튼 다행이다. 드디어 가야할 방향을 찾은 거잖아. (인류를 지키자... 라고. 그 누구보다 너다운 말이야, 메테오. 정말로 모든 걸 지켜냈잖아. 안 그래?)
 
HOPE:그야 네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했으니까...
...설마, 떠 본 건가?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젠장,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아무튼 서쪽으로 조금만 더 걸으면 될 것 같다.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모양이군.
 
그라하 티아:(하순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문 뒤 운동화가 눈에 푹 잠기도록 걷는다.) ...AOC는...
들어가게 될 거야. 물어봐줘서 고마워.
 
들어가게 될 거야. 마치 미래를 단정하는 듯한 당신의 말에...
 
메테오가 어깨를 으쓱입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네요.
 
HOPE:너만한 녀석이 동료로 온다면 안심이야. 그만큼 각오가 필요한 직장이기도 하지만.
음, 그래도... 민간인에게 구해지다니, 이건 돌아가면 엄청 놀림받겠는데......
 
그라하 티아:놀림은 무슨.......! 그런 녀석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이상한 농담이나 치는 애들 말이야!
 
HOPE:......어? 어어, 그래. (그러는 너야말로 이상할 정도로 화를 내고 있지 않나. 목을 가다듬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농담 삼아 해 본 소리야, 신호가 남아 있다는 건 동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니까.
 
죽었다고 생각하고 포기했을 줄 알았는데.
 
동료들이 믿고 기다리고 있다는 건 그에게 꽤 안심이 되는 일이겠죠.
 
이건 당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지만요, 그라하.
 
...그를 믿나요?
 
그렇다면 당신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겁니다.
 
...
 
꺾인 신호를 따라 11분을 더 걸었습니다.
 
두 사람의 앞을 깎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이 막아섭니다.
 
길이랄 것도 없는 막다른 곳이네요. 다른 길을 찾아야 할까요?
 
그라하 티아:잠깐, 멈춰!
......아무래도 이 절벽을 건너가야 하는 것 같아. 그 비틀어진 나뭇가지가 제대로 된 거라면.
 
HOPE:(헛웃음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징그러운 놈들, 부상병은 생각도 안 하지.
들어오라고 한 마당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가 원래 이런 식이거든.
 
절벽에 다가서면 불규칙한 간격으로 찍힌, 눈이 떨어져 나간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선발 부대가 어떤 길을 가로질러 갔는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AOC! 그들은 언제나 최강의 인류 집단이었죠.
 
최강에겐 막다른 곳조차 또 다른 길이 되는 법입니다.
 
절벽을 오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죠.
 
하지만 문제라면…… 당신이 연약한 민간인이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지금의 당신은 최강의 인류도, 최강의 크리쳐도 아닌걸요.
 
그라하 티아:와이어처럼 단순한 장치도 없고... (절벽에 다가가 다리를 올려 그나마 평평한 곳에 발을 올려본다.)
그렇더라도 헬기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것보단 한참이나 봐준 격이지.
여기가 최단 거리라서 동료들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몸이 아슬아슬하지만... 먼저 올라가 볼게!
 
HOPE:어, 엇!? 야, 잠깐, 기다려......!!
(허리춤에 매여 있던 로프를 잡아당긴다. 이상한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겁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그라하 티아:(몸이 휘청, 크게 한 번 뒤틀리더니,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훽 돌린다.)
마, 맞다...... 묶여 있었지.
 
HOPE:여기서 헛디디기라도 하면 부상으론 안 끝나. 용감한 건 좋지만, 너 말이지...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건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민첩해 보이기는 해도, 근력이 뛰어난 편은 아닌 것 같고. 아무리 봐도 눈보라로 미끄러워진 절벽을 아무렇지 않게 오를 만한 놈은 아닌데.)
 
메테오는 익숙하게 품에서 벨트를 꺼냅니다.
 
버클을 열고 길게 늘인 후…… 당신을 칭칭 감싸 묶네요.
 
HOPE: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알아. 날아갈 수도 없지.
그래도 여기선 내가 할게.
걱정되어서 이러는 거니까, 너무 나쁘게 듣지 말고...
 
벨트를 다 장착하고 나면 두 사람은 무척 가깝게 밀착합니다.
 
메테오의 등에 달라붙은 모양새가 새끼 원숭이 같기도 하고 새끼 거북이 같기도 하네요.
 
이 시절의 그는 최강의 인류지만 최강의 크리쳐는 아닙니다.
 
…괜찮을까요?
 
그라하 티아:아깝지도 않냐니, 누가 할 소리를...! (손을 올려 그의 머리털을 콱 쥐었다.)
이러다가 이쪽이 무거워서 네가 휘청하기라도 하면 둘 다 죽는다고! ...이래 봬도 몸은 가볍거든, 혼자서 할 수 있어!
 
HOPE:아, 아파.... (머리를 감싸고 앓는 소리를 낸다. 이상한 놈한테... 잘못 걸렸나?)
못 미더워서 미안하지만, 적어도 민간인인 너한테 걱정받을 만큼 약하지는 않아.
사격술, 생존술, 등반술. 입대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특공이야.
갑자기 자랑하는 기분이라 조금 민망하지만… 나는 셋 다 만점이었거든.
 
겁나면 머리털이라도 쥐고 있어.
 
그가 자신 있게 웃으며 절벽에 다가섭니다.
 
기억이 날 법도 하네요. 이 시절에도 그는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죠.
 
두 사람은 그런 점이 잘 맞았던 것도 같습니다
 
HOPE:좋아, 가 볼까.
 
그라하 티아:(......네가 우등생이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나야말로 걱정이 돼서...)
(천천히 머리칼을 움켜쥐던 손을 풀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조심해.
 
HOPE:걱정 마시지.
 
콱.
 
당신을 가방처럼 매단 메테오는 거침없이 절벽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특공이 주특기였다는 말,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크랙에 손가락을 걸고 훌쩍 뛰어오르는가 하면 책의 펼쳐진 면처럼 매끈한 코너를 온전히 팔 힘으로 딛고 기어오릅니다.
 
하나, 둘... 대번에 서너 개의 발판을 뛰어오릅니다.
 
그러다 크랙을 걸 만한 곳이 보이지 않자…
 
HOPE:………꽉 잡고 있어!
 
휙, 점프하듯 다음 발판으로 몸을 날립니다.
 
뒤에 매달린 당신은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복잡한 생각에 어지러워할 틈도 없습니다.
 
점점 지면이 멀어집니다.
 
어제까지만 했어도 이보다 높은 곳에서도 그와 함께 뛰어내릴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라하 티아:
기준치: 60/30/12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잡고 있던 크랙이 갈라지면서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집니다.
 
...
 
그대로 넘어지는 줄... 알았으나, 메테오는 어렵지 않게 다음 턱에 크랙을 겁니다.
 
수십 센치는 떨어지긴 했지만, 최강의 인류에게 이 정도야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HOPE:
오르기
기준치: 80/40/16
굴림: 1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둘을 매단 벨트가 쩔렁, 쩔렁, 어지러운 소리를 내면...
 
메테오가 다음 발판을 향해 도약하는 데 성공합니다.
 
크랙을 쥔 손이 부르터 핏방울이 맺히고, 매고 있던 벨트가 헐거워집니다.
 
설상가상으로 눈보라까지 기승을 부립니다.
 
시야 너머로 암석이 쏟아집니다.
 
그라하 티아:
기준치: 60/30/12
굴림: 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툭.
 
둘을 묶고 있던 벨트가 끊어지려는 순간!
 
파트너가 한 손으로 당신의 허리를 받칩니다.
 
HOPE: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참아.
 
그라하 티아:...말했지, 조심하라고!! 이쪽은 멀쩡해!
 
날카로운 대답에 그가 웃음을 보입니다.
 
칼날 같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고, 찬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
 
마지막 발판에 군화가 닿고, 크랙이 절벽 꼭대기를 콱 내리찍습니다.
 
...
 
휴우, 드디어 정상입니다.
 
HOPE:(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정상으로 몸을 날린다. 역시 멀쩡하지도 않은 몸으로는 무리였나.)
 
평평한 땅에 몸을 올린 메테오가 당신을 풀어주지도 않고 드러눕습니다.
 
샌드위치가 된 채로 호흡을 가다듬으면 자연히 시야에는 하늘이 들어옵니다.
 
회색 하늘,
 
흰색 눈송이.
 
겨울.
 
5년 전이고 5년 후이고 조금도 다르지 않은 풍경.
 
그때 보았던 하늘이 정말로 이랬던가?
 
그리운 느낌이 듭니다.
 
그래요, 분명히 그랬던 때가 있었어요.
 
우연히 AOC 요원이던 메테오를 구하고, 단둘이 한겨울을 걷던 때가.
 
그라하 티아:......으, 윽, 힘든...... 건 알겠는데, 비, 비켜.......
(몸을 바르작대며 위를 올려다본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하면서도 가 떠오른다. 왜 자꾸 새로운 기억이 나타나는 거야. 난, 그의 전부를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HOPE:미, 미안... 네가 가벼워서 망정이지, (숨을 고른다. 묶고 있던 벨트를 풀고 몸을 떼어냈다.)
조금만 더 무거웠으면 중간에 포기했을걸.
 
그라하 티아:...응. 알아, 힘든 일이라는 거.
그래도... 멋있었어.
고마워. 덕분에 편하게 올라왔다. 어지럽긴 했지만.
 
칭찬을 듣자 그의 뺨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추워서인가요. 귓바퀴까지 새빨갛게 익어서는, 그건 아닌 것 같군요.
 
HOPE:큼, ...거봐.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중간에 좀… 미끄러질 뻔하긴 했지만.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너를 잡아 일으키고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었다.)
이 정도는 너끈해. 최강의 인류는 허풍으로 댈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니까.
 
메테오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잇몸을 보이며 웃습니다.
 
불안조차 사그라트리는 새파란 웃음입니다.
 
이제 기억이 나나요?
 
처음 만났던 날의 그는 이런 얼굴로 웃고 있었죠.
 
당신이 AOC 요원이 되고자,
 
그라하 티아:(턱 막히는 숨에 고개를 휙 내리고 말았다. 매서운 추위 아래에 놓여 있는데도 식은땀이 흐른다. 흐트러진 얼굴로 그의 웃음이 남긴 파란 잔상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고. 메테오를 처음 본 순간, 그는 태양처럼 타오르지만 다정하게 푸른 빛을 내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밝고 선명한 그 따스함에 매료되었던 나는... 그가 이 눈밭 복판에 자리한 온기라고 여겼다.)
(괜히 퉁명스럽게 말이 나가는 것도, 전부 너 때문이란 말이야. 질끈 눈을 감고 한참 뒤에 얼굴을 올린다.) 메테오...
잘 들어, 반드시 내가 널 지켜낼 거야!
그땐... 또 다시 지금처럼 허풍이 아니라고 웃어줘야 해. 알겠어?
 
HOPE:(눈앞의 소년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멀거니 눈을 깜박이다가, 필사적일 정도로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반드시 지키겠다고. 겨우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이름과 소속 말고는 무엇 하나 알지 못하는 상대를?)
(대체 무슨 생각이야. 헛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결연한 이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선언.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긴장으로 목이 따끔거렸다. 둔감하다는 핀잔을 매일처럼 듣고 살았는데도.)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너무 무섭게 보지 마. 뚫어지겠다.
 
최강의 인류에게 지켜달라고 하는 이들은 수없이 보았어도, 최강의 인류를 지키겠다 선언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일 겁니다.
 
그러나 메테오는 당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눈빛만 보고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는 법이죠.
 
누군가를 간절히 위하는 진심, 같은 것들 말이에요.

 
절벽 위도 눈투성이인 건 여전합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이 빠질 정도로 켜켜이 쌓인 눈은 차고 단단합니다.
 
나뭇가지는 여전히 한 방향으로 꺾여있습니다.
 
역시 이 길이 맞았군요. 두 사람이 떨어져서 그 간격을 따라 걸으면,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옵니다.
 
건조한 눈 냄새가 납니다.
 
술렁거리는 공기는 꼭 짐승의 울음소리 같습니다.
 
HOPE:...힘들면 조금 쉬었다 갈까?
 
그라하 티아:이 정도는 일도 아니야. 크리쳐를 조우한 것도 아니고, 고작 걷거나 매달렸을 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물론 몸의 감도를 조절하는 건 익숙하지 않지만.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린다.)
너야말로 손바닥은... 괜찮은 거야? 무릎도 그렇고.
 
HOPE:(붉게 딱지가 앉은 손바닥을 등 뒤로 감춘다.) 어? 크흠, ......물론이지.
괜히 최강이 아니라니까. (쓸린 곳이 따끔거리기는 해도, 총만 쥘 수 있으면 된 거지.)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빤히 보고 있었다. 뭐 저렇게 붉지. 이 세상 색이 전부 한 사람에게 빼앗긴 것 같다.)
이건 내버려두면 알아서 나아져. 움직여도 괜찮으면 계속 이동하자.
 
그라하 티아:(그의 마지막 말대로 눈 안으로 푹푹 젖어 있는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무언가... 달라진 점은?!)
자연
기준치: 10/5/2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달라진 점은...
 
당신 하나뿐이네요.
 
이 이상하고 새하얀 세계에 유일한 오점.
 
붉고, 엉뚱하고, 제멋대로인 그라하 티아(25세). 그 외엔 없습니다.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옵니다. 메테오가 걸음을 재촉하네요.
 
HOPE:뭐야, 왜 멈춰 있어?
...어디 이상한 거라도 봤나?
 
그라하 티아:...아무것도 아니야. 자연을 느끼려고 했을 뿐이니까.
(잠시 멈췄던 걸음을 재개한다. 하여간, 과거에도 변함없이 이런 것만 이상하게 잘 알아차리네.)
 
온몸으로 바람에 맞서며, 두 사람은 행군을 강행합니다.
 
휘잉, 거센 눈보라가 밀려오고... 시야가 하얗게 물듭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온통 순백 일색인 세상.
 
원근감이 사라지고 나면 흰 세상에 오점처럼 남은 것은 두 사람뿐입니다.
 
주위로 두르고 섰던 나무들이 갑자기 창살처럼 당신의 주위를 둘러쌌다가,
 
손을 뻗으면 또 저 멀리 사라져버려 허공만 움켜쥡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한여름의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공간.
 
깜빡.
 
눈을 감았다 뜨면 메테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까부터 점차 멀어지더니 완전히 사라진 걸까요?
 
당신을 놓치고 홀로 나아가거나, 헤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눈보라를 가르며 나아가고 나아가도 보이는 이가 없습니다.
 
이 설원에 다시금 혼자가 되고 말았군요.
 
Z시의 안전지대까지는 크리쳐가 득시글할 텐데……
 
그런 게 문제가 아닌가요?
 
다시금 혼자.
 
그 사실이 살을 에는 추위만큼이나 사무칩니다.
 
그라하 티아:
SAN Roll
기준치: 85/42/17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합니다.
 
그라하 티아:(똑같은 풍경, 똑같은 상황. 넋을 놓고 걷고 있던 것도 잠시, 한 순간에 그의 부재를 깨달았다. 새하얀 벌판에 우뚝 멈춰 서자 지친 몸이 기우뚱거린다. 최강의 순발력을 가질 예정인 전신이 겨우 중심을 바로잡고, 움직임을 멈추자마자 몸 위로 빠르게 쌓이는 눈은 시야를 가렸다.)
메테오...?
어디 있어? 대답해!
...여기다!
 
그는 당신의 부름에도 대답이 없습니다.
 
목소리마저 먹히는 대자연의 백색은 이토록 깨끗하고 순수합니다.
 
그라하 티아:윽, (무거워진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떨리는 팔뚝으로 바닥을 짚으려고 해도, 눈속에 깊이 파묻힌 팔은 얽매인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눈이 뒤덮인 바닥을 긁어내는 일. 동시에 그의 행방을 찾는 일. 익숙한 기시감에 코끝이 붉어진다.) ....
(정신 차려, 그라하 티아. 이건 단순히 눈밭에서 종종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야. 이제 곧... 그의 목소리가 들릴 거야.)
 
당신은 파트너의 목소리를 기다립니다.
 
눈에 젖은 귀를 가만히 세우고, 청각을 집중하면...
 
그라하 티아:
듣기
기준치: 75/37/15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먹먹하게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
 
그러나 당신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고 있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HOPE:괜찮아?
 
손이 잡혔습니다.
 
묵직한 체온이 느껴집니다.
 
언제, 어느 때고 당신의 곁에 섰던 사람.
 
폭주와 죽음 후 깨어날 때마다 자리를 지키던 파트너.
 
당신이 그의 소생을 지켜보듯 그 또한 당신의 소생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몇 번이고 다시 만났던 그 얼굴입니다.
 
HOPE:하긴, 민간인이라면 이걸 겪어보는 건 처음이겠군...
 
비록 5년 전이라 수염도 없고, 미덥지도 못하고, 많이 앳되지만요…….
 
메테오는 당신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HOPE:화이트아웃이야. 안개가 가라앉으면 괜찮을 거다.
놓치지 않게 잘 붙잡고 있어.
 
그라하 티아:(떨리는 손으로 그를 힘있게 붙잡는다. 엄지로 손을 더듬은 것 같기도 했다. 울컥거리는 속을 진정시킨 뒤 숨을 몰아쉰다.) 놓으면 안 돼.......
 
HOPE:(무너져 있던 몸을 잡아 일으킨다. 그래, 안 놓을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대도록 부축했다.)
(아마도 이 녀석이 Z시의 마지막 생존자. 지난 습격으로 주위의 누군가를 잃기라도 한 모양이지. 크리쳐의 손에 가족이나 친구를 잃어버리고 트라우마를 겪는 피난민은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안쓰럽게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맞잡는다.)
(그런 이들을 위해, 나는 더욱... 강해져야만 해. 달래듯이 어깨를 감쌌다.)
 
그라하 티아:(몸을 기댄 후에야 호흡이 규칙적으로 돌아온다.) 앞으로는 고집도 안 부릴 수 있는데. 책도 제때 반납하고, 뺏어먹지도 않고... 조잡한 알바를 하면서도 사람을 위해 싸우고.
(느리게 얼굴을 떨어뜨리고 쓴웃음으로 그를 바라본다.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준 뒤, 손을 잡은 채로 무릎을 피고 천천히 일어난다.)
...계속 그 자리에 있었던 거지? 화이트아웃은 오랜만이라 방심했어.
 
HOPE:그래, 바람 소리에 묻혀서 불러도 못 듣는 것 같더라.
(시시콜콜한 후회를 늘어놓는 것치곤 창백한 얼굴이었다. 흘러넘칠 것처럼 축축해진 눈을 보다 못해 고개를 돌려버린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을 테지. 잡은 손에 힘을 넣고, 말없이 걸음을 뗀다.)
 
감각에 의존해 근처의 커다란 나무 근처로 이동합니다.
 
새하얀 시야를 앞에 두고, 유일하게 검은 나무가 보입니다.
 
빛이 들지 않아 거무죽죽한 뿌리 근처에 등을 기대고 앉으면 영하의 날씨에 새삼스레 체온이 뚝뚝 떨어집니다.
 
화이트아웃이 끝날 때까지, 잠시 온기를 나누며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HOPE:그러고 보니 내일이 크리스마스였지.
다들 이번 연휴는 잠잠할 것 같다고 신나 있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사태가 터지길래 난리도 아니었어.
 
그라하 티아:사람 일이 마음대로는 되지 않는 법이지. (몸을 기댈 지표가 있어서 다행인가. 허리를 굽히고 앉아 그를 본다. 아까와 같은 일이 발생할까 봐,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왜? 크리스마스에 일정이라도 있었어? 안 그럴 것 같았는데.
 
HOPE:일정... 까진 아니고, 연말마다 가는 곳이 있거든. (잡은 손과 눈밭을 번갈아 본다. 조금 민망한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도시에나 크리쳐 사태로 가족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있어. ...나는 어릴 때 산타를 정말 좋아했는데, 그 애들은 부모가 안 계시니 산타를 만날 기회가 없잖아?
다행히 AOC는 급여를 두둑하게 주니까, 연말이면 찾아가서 산타인 척 장난감도 주고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했는데.
올해는 영 글렀군. (앞머리를 헤집으며 앓는 소리를 낸다. 이 꼴을 봐라, 크리스마스에 산타는커녕 조난이나 당하고 있어서야...)
 
그라하 티아:너답게 좋은 일을 하고 있네. (산타 행세는 AOC의 지령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자의로 이런 선의를 베풀고 있는 건가.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됐어, 크리스마스 이브에 파견된 요원도... 어떻게 보면 '산타'라고 불릴 만하니까. 행복을 전해주기 위해 온 거잖아? 이건 산타의 덕목이기도 하고.
비록 대상이 아이들에게 한정되지는 않았지만. 장난감이나 간식을 받는 거랑은... 또 다른 기쁨일걸.
 
HOPE:그 말도 맞다. (AOC의 산타라, 나쁘지 않은 직함이네. 쓱 웃으며 잡은 손을 들어보였다.)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구조 신호는 놓친 것 같지만... Z시는 조만간 봉쇄될 예정이거든.
구해진 주제에 할 말인가 싶지만, 낙오된 덕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데려갈 수 있게 됐으니까.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너도 아직 애 같은데. (농을 치며 웃는다. 기껏해야 스무 살쯤 됐을까, 산타 행세에 속아줄 나이는 아니더라도 갓 스물이라면 어려도 한참 어리지.)
 
그라하 티아:알아! ...네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번에도 멋대로 말을 놓은 거 아니야.
...그런데... 봉쇄라니? Z시에서... 크리쳐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막무가내로 증식이라도 한 건가?
(봉쇄에 대한 기억도 나에게 남지 않았던 거겠지. 서로를 붙잡은 손을 힐끔 보며 숨을 들이킨다.)
 
HOPE:미안, 너무 많은 걸 말해버렸다. (입을 막고 시선을 돌리는 시늉을 했다.) 이상하게 너한테는 말하면 안 되는 것까지도 털어놓게 된단 말이지.
작전 내용은 비밀이야. 미안하게 됐어.
(이번에도, 라는 말에 뒷머리를 문질렀다. 날 만난 적이 있었다는 뜻인가? 작전 중에 민간인을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특이하게 생긴 녀석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라하 티아:알다시피 나는 Z시에 거주하던 사람이라고. (현재의 상태로는 말이지.)
내가 살던 도시가 어떻게 폐쇄되었는지 정도는 알아도 되는 거 아니야?
(거짓말. 지금부터 몇 년이나 지났다고... 앞으로는 모든 걸 털어놓지는 않을 거면서. 괜히 투덜거리며 운동화 끝으로 땅을 차자, 팍 하고 눈가루가 공중에 흩뿌려진다.)
......하아, 이제 갈 곳도 없어졌겠다. 네 말대로 AOC에 입사하면 딱이겠는걸.
 
HOPE:(공중에 날리는 눈가루를 보고 팍 웃음을 터뜨렸다. 봐, 애 맞잖아.) 큼, 알겠어. 원래는 부대장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지만......
넌 예비 후배니까 그냥 말해줄게. 아직 도시 전체가 폐쇄된 건 아니야. 탈환을 목표로 다른 구역에서도 지원을 오기로 했고.
나도 복귀한 뒤에는 다음 작전에 나가야 해. 아마 탈환 임무가 되겠지. ...그러다 이번처럼 반 시체 꼴이 될지도 모르고. AOC라고 하면 다들 멋집니다,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거든.
가는 동안 더 고민해 봐. 그래도 너라면 잘할 것 같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눈발이 옅어져 있습니다.
 
그는 당신을 부축하여 일으킵니다.
 
HOPE:이제 이동하자, 바람이 그쳐서 덜 춥겠다.
 
그라하 티아:좋아, 시야도 이전보다 맑아졌어. 조금 배고픈 것 빼곤 문제 없어!
 
화이트아웃이 지나간 후, 반대편을 내려다보면 저 멀리 도시가 보입니다.
 
당신이 나고 자란 Z시입니다.
 
크리처에게 쫓겨 이만큼이나 멀리 떨어졌던 거군요.
 
새삼스럽게 그 거리가 실감납니다.
 
나뭇가지를 꺾은 흔적은 더 보이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선명하기 때문이겠죠.
 
HOPE:Z시 17번 게이트 근처에 작전 본부를 꾸리기로 했어. 거의 다 와 가는군.
 
다행히도 절벽을 다시 내려갈 필요는 없습니다.
 
완만한 비탈길이 나타났거든요.
 
두 사람이 부지런히 걸으면 곧 Z시 외곽에 도착합니다.
 
높이 쌓았던 바리게이트는 무너지고, 뼈대를 드러낸 건물의 잔해 사이로 크리쳐가 돌아다닙니다.
 
메테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일지도 모르겠어요.
 
탄환이 모자랄 수도 있고, 민간인인 당신을 데리고 무리할 수는 없으니 조심해야 할 텐데요.
 
외곽에서 17번 게이트로 향하는 길은 3갈래로 나뉩니다.
 
그라하 티아:......이거, 여분의 무기도 없다고 했으니...... 맨주먹으로 크리쳐를 날려버릴 수도 없고. (이미 한 번 그랬던가? 머리를 긁적이며 적들의 동태를 파악한다.)
아무래도 숨죽여서 지나가야 할 것 같지? ...어떻게 생각해?
 
HOPE:그래야겠다. 아무리 나라도 맨주먹으로 크리쳐를 날려버리는 기행은 못 하거든.
게이트까지 가는 길은 세 갈래인데, 거리는 엇비슷해.
도로, 학교, 놀이터 중에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골라 봐.
(어딜 가든 위험하긴 마찬가지겠지만. 소총의 물기를 조끼 밑으로 비져나온 티로 문질러 닦았다.)
 
그라하 티아:(...역시 총을 쓰려고 하고 있군. 손바닥도 다쳤으면서... 바보같이.) 나만 믿어,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노력해볼게!
그건... 세 개의 길이랑 이어진 시설인 건가?
......너랑 함께하고 있기도 하고, 학교가 익숙한걸.
정했어. 학교!
 
HOPE:익숙하다고?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역시 학생이었던 건가.)
맞다, 학교에서 총기 지식까지 배웠댔지. 그새 많이 바뀐 모양이야.
내가 다닐 땐 그런 건 안 가르쳤는데. 크리쳐가 나타나기도 전이었으니 당연하지만.

 
둘은 학교를 가로지르기로 합니다.
 
Z시의 지리에 익숙한 당신의 안내 덕분에, 둘은 무사히 학교까지 도착합니다.
 
조금 그리운 기분이 드네요. 일 년 전 오늘도 메테오와 함께 학교에 왔었죠.
 
이곳의 파트너에겐 일 년 전이 아닌... 4년 후의 미래가 되겠지만요.
 
학교 정문에는 크리쳐가 득시글거립니다.
 
정면돌파는 어렵겠어요. 그나마 구교사 쪽은 괜찮아 보이는데…
 
구교사는 담벼락에 막혀 있습니다. 넘지 않고서는 지날 수 없어 보입니다.
 
HOPE:...정면에서 들어가면 안 되겠지?
 
그라하 티아:그래. 정면돌파는 무리야. ...하지만 다른 좋은 방법이 있어 보이는군.
(담벼락을 훑어 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고 보니....
...손의 상태는... 완화된 거야?
 
HOPE:......아, (놀란 눈을 하고 돌아본다. 그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
이 정도는 부상 축에도 안 들어가. 걱정은 고맙다.
누가 이렇게까지 걱정해주는 건 처음인데. (멀쩡하다는 듯이 두 손을 털어 보였다.)
돌아가려면... 담을 넘어야겠어. 먼저 넘어가서 도와줄 테니까 잠깐 기다려.
 
그라하 티아:(이 정도 높이의 담은 열 살 때도 넘어다닌 것 같지만. 어깨를 으쓱인 뒤 꼬리를 살랑였다.) 좋았어. 무슨 재주를 부리든 안전하게 지나가자고!
 
담벼락을 올려다보던 메테오가 앞장섭니다.
 
최강의 인류 메테오, 오르기 판정.
 
HOPE:
오르기
기준치: 80/40/16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최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는 높은 담을 훌쩍 뛰어오릅니다.
 
건너편에서 쿵! 착지하는 소리가 나네요.
 
다음은 당신 차례입니다. 그가 도와주겠다 했지만,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죠.
 
최강의 민간인 그라하 티아, 오르기 판정.
 
그라하 티아:어, 어이! 별 걱정은 안 되지만...!
등 밟히지 않게 조심해!
오르기
기준치: 80/40/16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펄쩍.
 
정식 훈련을 받기 전일지언정 당신의 몸은 최강의 민첩함을 기억합니다.
 
담벼락을 날듯이 뛰어올라,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그라하 티아:
기준치: 60/30/12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무릎을 터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던 메테오의 등에 운동화가 착지합니다.
 
그러게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듣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당탕! 등이 밟힌 그가 엉망으로 엎어집니다.
 
HOPE:악, 아프잖아......!!!
 
...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사히 교사 안으로 진입합니다.
 
파트너는 발자국이 남은 등을 쥐고 궁시렁거립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심하지 않은 사람 잘못이지요. 교사 안은 고요합니다.
 
몇 학년 몇 반인지 적혀있던 팻말은 형편없는 모양새로 바닥을 뒹굴고 있습니다.
 
그라하 티아:...아까부터 엄살은.
많이... 아팠어?
 
HOPE:엄살 아닌... (투덜거리다가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표정이 풀어진다.) ...미안, 엄살 맞다.
별로 안 아파. 넌 가볍기도 하고.
여기까지 오니까 학창시절 생각이 다 나네, 그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야.
 
그라하 티아:아무리 가볍더라도... 성인 남성한테 밟히면 통증은 느끼게 되거든.
(느슨해진 얼굴이 시선에 들자 뺨을 붉히고 헛기침을 한다.) 됐어, 심하지 않다는 건 알겠으니까.
...메테오, 네 학창시절은 어땠는데?
 
HOPE:어땠을 것 같나? (너는 성인 남성, 치곤 좀 작지만. 총을 휘적이며 능청스레 웃었다.)
 
그라하 티아:으음. 글쎄, 어째 한 번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안 나네.
......그냥 혼잣말이야. 조난 비슷한 걸 당한 이후로 조금 어지러워서... 헛소리해도 넘어가.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았다던가.
 
HOPE:그렇긴 했지.
(진짜 특이한 놈이네, 중얼거리며 한 뼘 낮은 어깨를 당겨와 감싼다.)
넌 엄청 말 안 들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그랬는데.
교복 대충 입고, 축구하다 창문 깨 먹고, 튀는 짓 해서 매번 혼나고 그랬어.
 
그라하 티아:(몸이 끌려가자 잠시 움찔거리며 동요했다. 함바그라도 잘못 먹었나...!) 아... 아니거든!
적어도 난 축구하다가 창문 깨 먹은 적은 없어. ...올라가면 안 되는 곳에 몸 좀 뒀다고 소리 들은 정도야.
그것도 혼이 나지 않게끔 요령이 있었지. 아무튼 공부도 열심히 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고.
 
HOPE:나도 문제는 없었거든? 공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재밌게 지냈는데.
 
조용한 가운데, 두 사람의 말소리만 복도 안을 울립니다.
 
그라하 티아:
듣기
기준치: 75/37/15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어라? 무언가 들린 것 같습니다.
 
근처 교실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눌한 발음과 느린 억양이 숫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HOPE:그라하? 왜 그래?
 
그라하 티아:... ...목소리가...
(그를 뒤로하고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뭐라고... 하는 거야? 숫자 세기 연습이라도 하는 건가?)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숫자를 아무렇게나 세고 있네요.
 
어린 아이인 걸까요?
 
HOPE:목소리? (귀를 기울이더니 미간이 좁아들었다. 아직도 생존자가 남아 있었나?)
가 보자, 사람일 수도 있어.
 
그라하 티아:(메테오는 듣지 못한 건가? 진지한 얼굴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인 뒤, 목소리의 출처를 향해 신속하게 걸음을 옮겼다.)
 
교실을 들여다본다면……
 
칠판 앞을 배회하는 생체형 크리쳐를 발견합니다.
 
거대한 살덩어리는 끊임없이 녹아내리고 응고하며 한 가지 모양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역한 냄새가 닫힌 문 너머로 밀려옵니다.
 
산성액에 녹아내린 칠판 틀은 이미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생체형 크리쳐의 것입니다.
 
그라하 티아:
은밀행동
기준치: 80/40/16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HOPE:
은밀행동
기준치: 60/30/12
굴림: 71
판정결과: 실패
 
달각.
 
내부를 확인하기 메테오가 발을 내딛자, 낡은 문이 소리를 냅니다.
 
목소리가 뚝 끊기고 생체형 크리쳐가 고개를 돌립니다.
 
녹아내리는 살덩이가 두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어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쾅!
 
메테오가 대 크리쳐용 살상 무기를 갈무리합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생체형 크리쳐의 잔해가 꿈틀거립니다.
 
핵을 부순 건가?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HOPE:뛰어!!
 
그가 손목을 잡아채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소란을 알아챈 크리쳐들이 몰려오는지 위층과 아래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HOPE:젠장, 문이 막혔잖아...!!
수가 많아, 빠르게 도망쳐야겠어.
 
그라하 티아:하, 하지만, 어눌하지만 정말로 사람 목소리였는데...!!
 
HOPE:...변종인 건가, 모르겠어. 지금은 널 대피시는 게 먼저다.
 
그렇게 말한 메테오가 문을 걷어차면... 쇠문은 덜컹이며 힘없이 튿어집니다.
 
그리고 벌어진 문 앞에, 금속형 크리쳐 7마리가 길을 막아섭니다.
 
메테오는 제일 먼저 당신을 자신의 뒤로 물립니다. 무기도 없는 민간인을 상대로는 당연한 수순입니다.
 
늘 옆에서 싸웠던 당신에게는 어색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5년 전에는 그랬습니다.
 
그라하 티아:(아까 그 살덩이는 실험체의 결과물이다, 이건가. 이때도 악질이었다는 거지...... AOC 녀석들. 불만스럽게 혀를 찬 뒤 눈앞의 크리쳐들을 노려본다.) 네 실력을 보여줘, 저런 조무래기들한테 지지 말고!
 
사람 목소리가 나는 생체형 크리쳐.
 
그 정체를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죠, 그라하.
 
달려드는 크리쳐를 향해, 아무것도 모르는 파트너가 총구를 겨눕니다.
 
메테오와 크리쳐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익숙한 과정입니다.
 
img
 
HOPE:걱정 마, 최강은 폼으로 하고 다니는 소리가 아니니까.
(매고 있던 총기를 장전하자마자 방아쇠를 당긴다. 이런 자세로는 반동이 심해도 어쩔 수 없지, 뒤에는 민간인이 있고, 탄환은 많지 않다. 수가 적으니 빠르게 해치우고 보는 수밖에!)
대 크리쳐 살상탄
기준치: 85/42/17
굴림: 98
판정결과: 실패
피해: 7
 
그러나 물기가 남은 소총은 연기만 뿜어내며 불발합니다.
 
빈틈을 발견한 크리쳐들이 우르르 덤벼듭니다.
 
생체형 크리쳐:
불쾌
기준치: 50/25/10
굴림: 54
판정결과: 실패
피해: 1
 
캉!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총신의 딱딱한 표면이 움푹 팹니다.
 
총기 끝으로 금속형 크리쳐를 야구공처럼 저 멀리 걷어낸 메테오는 망설임 없이 장전합니다.
 
총성이 터지는 동안 얼마나 천지가 시끄럽고 사위가 흔들리는지,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입니다.
 
5년 전 몸이란 이토록 약했던가요…….
 
그를 돕기 위해 나서야 할까요? 숨어 있는 편이 나을까요?
 
그라하 티아:......너......!!
큰일날 뻔했잖아! 그렇게 할 거면 총 이리 내!
(또 다시 무력하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메테오는 내가 지킬 거라고! 크리쳐를 노려보던 눈길이 방향을 달리하여 매섭게 그를 향한다.)
 
HOPE:.......!!
 
파트너가 무어라 외친 순간, 듣기 판정.
 
그라하 티아:
듣기
기준치: 75/37/15
굴림: 71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르륵. 그륵.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입니다.
 
당신의 등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러니까, 꼭, ‘그어그어’하고 우는 것 같네요.
 
클리셰 SF 세계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크리쳐의 울음소리처럼……
 
생체형 크리쳐:그르르르……
 
당신이 돌아서면 생체형 크리쳐가 지척에 다가왔습니다.
 
입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구멍을 커다랗게 벌린 구체는 자아를 잃고 허기에 몸부림칩니다.
 
당신과의 거리는 약 3cm.
 
삼켜지기 일보 직전.
 
무기도 없는 당신이 뭘 할 수 있겠어요?
 
메테오를 기다려봤자, 당신의 머리가 산성액에 뭉개지는 게 더 빠를 겁니다.
 
그라하 티아:
지능
기준치: 90/45/18
굴림: 2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
 
당신의 육체는 이전과 다르지만, 머릿속의 지식만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크리쳐를 잠재우는 주문을 알고 있잖아요? 자장가를 부르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알파를 재우는 자장가]를 입수합니다.

 

 

 
그라하 티아:(크리쳐의 구멍으로 엿보이는 심연에 동공이 수축한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펼쳐진다. 역한 냄새가 풍겨오는 동시에 머리를 삼키려 드는 아가리. 그 정체를 확인한 후에는, 마치 이 녀석이 가진 허기에 대응하는 식욕처럼, 크리쳐의 '본능'과도 같이 1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시간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어쩌면 나에게 남은 크리쳐 세포가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르지.)
정신
기준치: 85/42/17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정신
기준치: 85/42/17
굴림: 80
판정결과: 보통 성공
(메테오에게 약속했잖아, 걱정하지 말라고, 지켜주겠다고! 이런 걸로 흔들려서 바보같은 모습 보일 생각 없어....!)
 
파트너를 떠올리는 순간 사고가 일렁입니다.
 
아주 잠시, 흐트러졌던 정신을 집중하고... 당신은 떠올립니다.
 
주문을 외우는 당신조차 알지 못하는 음율과 가사.
 
파트너의 색으로 빛나는 마력이 당신의 몸을 감고 타오릅니다.
 
그리고 전직 최강의 인류, BARD.
 
기억하고 있나요?
 
당신이 어째서 그 이명을 택하기로 했는지.
 
지금의 파트너라면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만...
 
오직 괴물을 위한 자장가를 부르고 있노라면 고요한 목소리는 거대한 총성과 죽어가는 것의 울음에 파묻혀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그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잠결에도 자장가를 따라 부르는 법.
 
머나먼 곳에서도 어머니의 부름만은 알아듣는 것.
 
 
...
 
쿵.
 
자장가를 들은 생체형 크리쳐는 잠자코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중력을 거스르고 부유하던, 외계와 이 별의 끔찍한 혼합물은 아스팔트 도로에 누워 잠을 청합니다.
 
산성액이 검은 땅 위에 그어진 흰 선을 뭉개고 지우며 흘러나옵니다.
 
신발 끝을 태우고 싶지 않다면 한발 물러서는 게 좋겠어요.
 
죽지는 않았으나 한동안 잠들어 일어나지 않을 존재입니다.
 
물론 어느 순간에는 눈을 뜨겠으나, 적어도 당신이 살아가는 5년 후의 세계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테고,
 
아니, 미처 다다라서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오늘만은 평안하겠죠.
 
마력을 1점 차감합니다.
 
그때입니다.
 
HOPE:방금 노래 멋졌어. 어떻게 한 거야? ...다친 덴 없지?
 
전투를 마무리한 메테오가 당신에게 돌아옵니다.
 
노래를 듣고 있었던 걸까요? 그는 넋이 나간 표정입니다.
 
그라하 티아:(노래를 마친 뒤, 양팔을 들어 신체를 휘감는 푸른 빛줄기를 내려다본다. 이거, 옥상에서 보았던 그 잔광.... 1년 전과 똑같아. 미숙했던 나를 지켜주고, 안심시켜 주었던...)
(공중에서 새파란 잔광이 흩어지고, 공간을 밝히던 마력이 완전히 사라지자 메테오를 향해 돌아본다. 놀란 듯한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가벼운 미소가 절로 나왔다.) 이건... 글쎄, 할 말이 없네. 네가 먼저 시범을 보였던 거라서.
보다시피 다친 곳은 한 군데도 없어. (팔을 T자로 들어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보인다.)
 
HOPE:내가 시범을 보였다고? ...그렇군. (미안하지만 내 노래 실력은 끔찍한데. 다른 누군가와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멋쩍은 눈치로 턱을 매만졌다.)
다음에 시간 나면 노래방이나 가자, 시범이 어떤 건지 제대로 들려줄게.
아무튼 크리쳐가 저런 식으로 쓰러지는 건 처음 보는데... 노래로 제압한다니, 무슨 게임 속 음유시인 같네. Z시에서 살아남은 이상 평범한 민간인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너 정도면 정말 AOC에서도 최강이 되겠어.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조심스럽게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HOPE:날 지켜주겠다는 말은 정말이었지? 그냥 웃어 넘기려고 했는데, ...믿음직스럽네.
 
그라하 티아:그럼 빈말로 할 줄 알고? (손을 마주잡고 씩 웃어 보였다. 그가 나무 아래에서 행동했던 것처럼, 잡은 손을 위로 들고 꼬리를 흔든다.)
그, 그리고... 시범 말인데. 네가 동굴에서 자는 동안 우렁차게 코를 골아대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들어버려서 말이야! (거짓말이지만. 반대쪽 손으로 뺨을 긁으며 표정이 어색하게 느슨해진다.)
노래방은... 기회가 되면 가자. 우선, 우리는 해야 할 게 있으니 넘어가자고.
 
HOPE:뭐, 뭐… 그랬나?
 그랬다고? 젠장, 미안하다. (이마 끝까지 화끈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팍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잠버릇 때문에 동기들한테 매번 욕을 먹고 있는데…
고치려고 해도 잘 안 되네. (목을 가다듬으며 총기를 정리했다. 첫 만남부터 인상을 완전히 구겼군...)
......이만 본부로 복귀하는 게 좋겠어. (소총 끝으로 크리쳐가 녹아내린 잔해를 가리켜 보인다.) 이놈들이 언제 다시 날뛸지 모르니까.
 
바닥에는 살점 덩어리가 된 크리쳐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가 무감한 눈으로 크리쳐를 내려다봅니다.
 
HOPE:이것들은 변종이야. 일단 생체형 크리쳐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건 임시 이름이고, 핵의 위치를 외부에서 볼 수도 없고, 제각각 이상한 능력도 달고 있어서 상대하기 까다로워.
아직 정보도 충분하지 않고...
연구소 쪽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생체형 크리쳐는 인간의 시체를 먹고 진화했다는 설이 유력하다는군.
죽을 때 죽더라도 시체는 남기고 싶은데, 난 그런 꼴이 되기는 싫다.
 
그라하 티아:알고 있어. 이 변종 크리쳐 때문에 너도 그렇게 애를 먹고 있는 거잖아. (소총 끝이 향하는 살덩어리를 보며 미간을 좁힌다. 학교에 온 이상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아차려야 했는데. 분명... 이 크리쳐, 단순히 수업을 듣던 어린아이였을 거야.)
(다시 고개를 올려 메테오를 똑바로 바라본다. 굳어 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꽤 흥미로운 가설이네. 아니, 가설이 아니라 오보를 내보냈다고 해야겠지만.
메테오, 잘 들어. 생체형 크리쳐를 마주쳤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니까. 중요한 이야기야!
 
HOPE:크리쳐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건가? ......음, 여태껏 AOC의 연구원들이 잘못된 정보를 전한 적은 없었는데.
알았어. 뭔데. (주저하다 어렵게 끄덕인다.)
 
그라하 티아:말마따나 연구원들이 생체형 크리쳐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거야. 그것도 의도를 가지고 말이지. (검지를 들어 여전히 괴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육편을 가리킨다.)
...한낱 스무 살인 내 얘기가 믿기지 않겠지만, 똑똑히 들어. (손가락이 궤도를 그리더니 쿡, 그의 가슴팍을 찌른다.) 거두절미하고... 생체형 크리쳐는 본래 인간이었어!
인간을 먹고 진화한다니, 말이나 되는 변명을 내놓아야지. 인간 쪽이 크리쳐를 굽거나 삶아 먹는 게 더 논리적이겠다. (불만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그의 반응을 살핀다.)
 
HOPE:......그게 무슨 헛소리야. 인간이 어떻게 크리쳐 따위가 된다는 거지?
(인상을 구기고 노려본다.) 네가 특이하다는 건 알겠어.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지만 이번에는 네가 틀렸다. Z시가 이렇게 괴멸한 것도 생체형 크리쳐가 하루아침에 불어났기 때문이야. ...덕분에 내 동료도 수없이 죽었어!
크리쳐에 대한 정보는 극비고, Z시는 AOC에서 철저하게 보호 중이었는데,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콱, 벽을 걷어찼다.) 무슨 수로 민간인들이 크리쳐가 되었다는 거야?
 
그라하 티아:(벽의 굉음을 무시하고 눈썹을 올려 그를 노려본다. 손가락을 떼어낸 후 팔짱을 낀다.) 예상된 반응이야.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알고.
그 말에서 괴리감을 못 느끼겠어? Z시는 AOC에서 철저하게 보호 중이었다. 그런데도, 크리쳐는 인간의 시체를 먹고 하루아침에 대거 진화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요원들이 모두를 지켜내지 못한 건 너를 비롯한 그들의 능력 탓이 아니야. 인간이 스스로 크리쳐로 변모되는 걸 누가 막을 수 있겠어?
생체형 크리쳐 발현 이후... 실종자들의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진 사고에 의문은 안 가져 봤어?
 
HOPE:(눈가에 주름이 팼다. 인간이 스스로 크리쳐로 변모했다고? AOC가 보호하고 있었는데도?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는... 그렇다는 말은. 입을 다문 채 한참 말이 없었다.)
그야, ...크리쳐들이 실종자들의 시체를 파먹었을 테니까......
 
그라하 티아:짐승이나 크리쳐나, 시체를 먹는다면 뼈와 살점이라도 남아 있어야 해. ...그런데도...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마냥 실종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지.
인간이 크리쳐가 된 이유는 바이러스 때문이야. 연구원이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만든 후에 요원들과 시민들을 속인 거라고!
 
생체형 크리쳐의 진상.
 
정의감에 가득 차 있던 지금의 그에게는 환멸이 날 정도의 이야기.
 
그럼에도 그를 위한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폭로입니다.
 
당신이 진실을 쏟아내고 나면 메테오는 곧은 눈으로 당신을 노려봅니다.
 
HOPE:그래? 크리쳐 바이러스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서 사람들을 크리쳐로 만들었다는 말이지.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그게 정말이라면 사사건건 최전방에 뛰어드는 우리 AOC 요원들부터 크리쳐가 되었을 거다.
게다가 Z시의 생존자들은 아무 이상 없이 무사해. 인간이 크리쳐가 되는 모습을 보았다는 제보도 없다. 결정적으로... 그런 소릴 하고 있는 너조차도 멀쩡하잖아.
네가 어려서 못 믿는 게 아니야. 그 말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세상이 무슨 클리셰 영화처럼 돌아가는 줄 알아? 우리는 빌어먹을 사명감 하나만을 가지고, 매 순간 죽을 각오를 하고 크리쳐를 상대하고 있어.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헛소리는 그쯤 해 둬.
 
그라하 티아:(양쪽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더니,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붙잡는다.) 아니야! 이건 클리셰 영화가 아니라 안전지대의 현실이다! ...네가 그러는 것도 이해하지만, 너만은 내 말을 믿어줘야 해...!
앞서 대피한 생존자와 네 동료들은 무사했지만, 발령을 받아 Z시를 처음부터 수호하던 AOC 요원들은... 너도 알다시피 전멸했을 거야. 이런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둘째 치고.
...회사가 그 시체의 행방을 탐색한 뒤, 보고하는 결과를 듣고 판단하기에는 너무 늦어.
크리쳐 바이러스가 Z시에 퍼진 이상, 지금 우리 둘조차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거야. 모두에게 알려야 해. 기자에게 제보를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HOPE:(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정면을 응시했다. 정적이 이어지던 중, 짧은 조소와 함께 들고 있던 총을 장전한다. 너무 무르게 대했군.)
...내가 네 말을 왜 믿어야 하지?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기에 여태 의심하지 않았는데. 군사 기밀을 수상할 정도로 꿰고 있고, 하는 짓도 평범한 스무 살짜리 같지는 않아.
그런 사실을 네가 알고 있는 이유, 대충 짐작해 본다면 AOC의 전복을 노리는 반정부 단체 스파이쯤 되어서겠지.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정말, 상관없었어.
목숨을 빚졌으니까. 그 정도는 모른 척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군인이야. 그 이상 내 소중한 동료들과 소속을 욕보이겠다면,
 
철컥.
 
그가 당신의 머리에 장전된 총구를 들이밉니다.
 
HOPE:발포하는 수밖에 없어.
 
그라하 티아:그건...!!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총구가 머리를 누르자 흠칫 시선을 옆으로 한다. 차가운 도시에 놓여 차가울 수밖에 없는 장치, 그 냉기가 평소보다 더 시리게 느껴졌다.)
(지금의 메테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야. 어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모든 것을 말하는 거라면...)
(눈동자를 틀어 그를 보고 중얼거린다.) ...잘난 듯이 모르는 척했다고 얘기하는데 말이야. 이쪽은 스파이가 아니다. 나도 너 같은 군인이었어. 그것도 AOC 소속이었다고.
군사 기밀을 외우고 있는 것도... 연구원의 괴상한 실험 결과를 알고 있는 것도, 총기의 외형만 보고도 이름을 읊을 수 있는 것도, 전부 내가 AOC 요원이었기 때문이야! 그러니 총 내려, 메테오!
 
HOPE:(눈을 흘겼다가도 순순히 총구를 내린다. 그래, 내가 AOC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 그렇지만...)
...우린 애들은 안 받거든, 멍청아. 거짓말을 할 거면 더 그럴듯한 걸로 해.
 
그라하 티아:자꾸 애라고 하는데.... (사, 살았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침을 삼킨다.)
이렇게 보여도......
나는 25살이야. 지, 지금은 너랑 얼마 차이 안 날걸.
 
HOPE:됐어, 그래. ...속아줄 테니까, 다신 그러지 마라.
이만 돌아가자. 해가 지기 시작했어.
(경직되어 있던 표정을 풀어 씁쓸하게 웃었다. 상관없어. 전직 스파이든, 전직 AOC든.)
(지금은 내가 살려서 데려가야 할 민간인일 뿐이다. 식은땀을 흘리는 너를 두고 먼저 걸음을 뗐다.)
 
그라하 티아:...기다려, 같이 가!
(그의 뒤를 따라 발걸음에 속도를 붙인다. 메테오, 역시 안 믿고 있는 거지...)
 
믿을 리가 없잖아요.
 
지금의 그는 당신에 대해서도, AOC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걸요.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이란 이토록 한심한 얼굴을 하는 법입니다.
 
속마음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곧 AOC 작전 본부에 도착합니다.
 
...

 
...
 
저 멀리, 눈덮인 텐트와 본부가 보입니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비록 파트너는 여전히 생각이 많아보입니다만...
 
텐트를 바쁘게 오가며 무기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AOC 엠블럼을 달고 있습니다.
 
그들을 발견한 메테오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HOPE:다 왔어. 이제 안전해.
 
안전지대의 최전방을 수호하는 인류의 영웅.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강의 인류.
 
이 정의에 오점은 없습니다.
 
그렇게 믿는 메테오의 눈동자는 여전한 색으로 빛납니다.
 
TRUTH:메테오!
 
SOLACE:살아 있었구나!
 
TRUTH:그럴 줄 알았어! 말했지, 내가 저놈은 명이 끈질겨서 살아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
 
이런 거리에서도 용케 알아본 동료들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옵니다.
 
당신이 아는 얼굴도, 모르는 얼굴도 섞여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의 생환을 두고 내기를 했는지 동전을 던지고 받기도 합니다.
 
메테오를 둘러싸고 웃고 환영하고 안도하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당신은 오롯한 외부인입니다.
 
그라하 티아:(쭈뼛거리며 본부의 상태를 확인했다. 눈밭에 설치된 텐트, 그리고 총기의 쩔렁거리는 소리. 방탄복이 팔꿈치에 긁히는 소리도 들리고... 괜히 양쪽 귀를 내리고 만다.)
(분명 AOC의 정의에 만족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무거운 발을 이끌고 메테오의 옆에 붙는다.) ...다시 갈 셈이지? 임무를 하러.
 
HOPE:그래야지. Z시엔 아직 크리쳐가 남아 있으니까.
(웃는 낯으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마를 맞대기도 하고, 등을 두드리기도 하며 긴장을 덜어낸다. 와락 안겨드는 동기를 받아내며 네 쪽으로 눈을 굴렸다. 괜한 걱정을 시키고 말았군.)
넌... 여기서 좀 기다려야 할 거야. 윽, 이거 놓고...!
 
...
 
한참 복귀를 반기던 사람들이 진정하면,
 
그제야 누군가,
 
TRUTH:저 녀석은 뭐야. 생존자가 남아있었나?
 
그라하의 존재에 의문을 품습니다.
 
HOPE:그래. 구조 신호를 보낸 당사자는 아니었다지만... 눈밭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너희랑 헤어지고, 구조 신호도 끊기고 해서... 되는대로 크리쳐를 피하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이쪽이 구해준 덕분에 살았다. 아니었으면 진작 얼어 죽었을 거야.
 
TRUTH:최강의 인류라는 녀석이 민간인에게 역으로 구조당하다니, 넌 AOC 타이틀 떼라.
 
HOPE:시끄럽거든. 서로 구해주면서 온 거야. ...생존자가 늘었으면 된 거지.
 
어쩐지 익숙한 풍경이네요.
 
SOLACE:저기, 훈훈한 분위기에 미안하지만... 이를 어쩌지.
 
곤란한 기색의 SOLACE가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SOLACE:Z시의 생존자들은 이미 X시로 이송했어. 수송용 차량도 전부 떠나버렸고...
지금 남은 인원은 전투에 투입될 소수 정예뿐이라……
 
작전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난감한 얼굴로 턱을 굅니다.
 
HOPE:괜찮아, 여기서 기다리게 하면 되니까.
너희가 지키고 있을 거잖아? 이 녀석, 이래 봬도 꽤 강골이더라고.
(빨리 그렇다고 해, 네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그라하 티아:시... 싫어!
라미... 아니, 그쪽... 나도 소수 정예에 껴줘! 요원들의 인력도 한참이나 부족한 거 알고 있어. 그만큼 크리쳐의 수가 늘어나고 있을 테니까.
총도 잘 쓸 수 있어. 정말이야. 원한다면 시험해 볼래?
 
HOPE:......
(대뜸 네 입을 틀어막았다. 눈짓으로 동료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버둥거리는 몸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라하 티아:(으븝, 이, 이거 놔..............)
 
주변을 감싸고 있던 사람들이 당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럴 수밖에요. 메테오야 당신에게 생명을 빚졌으니 그렇다 쳐도...
 
다른 요원들이 보기에 당신의 능력은 수상한 점 투성이일 테니까요.
 
HOPE:(입 다물고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라. 끌려가고 싶어?)
 
그라하 티아:(입을 막고 있는 손목을 양손으로 쥔다. 예전부터 힘 하나는 좋아서 떨어지지가 않잖아...!)
 
메테오는 당신을 이끌고 가까운 텐트로 들어옵니다.
 
HOPE:본부도 지켜야 하니 SOLACE와 소수 인원이 남아있을 거야. 넌 여기서 기다려.
전투가 끝나면 함께 X시로 가자. 금방 돌아올게.
 
그라하 티아:(푸하, 손을 떼버린 뒤 이를 갈고 얘기한다.) 됐다니까! 너는 알잖아. 내가 요원이었다는 거.
TRUTH, 아르버트. SOLACE는 라미트. 그들의 이름이지? 이미 알고 있다고.
 
HOPE:가서 조회해 보고 없으면 쏴버리... ...
......
.........?
 
..파트너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워집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조사했냐는 눈치네요.
 
그라하 티아:......특별한 사정으로 지금은 요원이 아니지만... 뭐, 퇴역 군인이라고 해둘까....
아무튼 네 선배다 이 말이야.
내가 더 윗사람이라고!
 
HOPE:(이 황당한 소리를... 믿어야 하나?)
...군번, 불러. 정말 조회하고 올 테니까. 이력이 있다면 작전에도 참여하게 해 주지.
 
그라하 티아:.......
그, 글쎄... 이력은 없을 텐데.
...실력으로 승부하면 안 되나?
 
HOPE:되겠냐? 이 막무가내 스파이놈아.
 
그라하 티아:스파이 아니라니까. 그런 게 목적이었다면 넌 이미... ....
(가벼운 농담을 던지려다가, 잠시 침묵한 뒤 작게 고개를 숙인다.) ...아무튼...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총 하나만 준다면.
 
HOPE:세상 어떤 스파이가 개 목숨만도 못한 AOC 요원 하나를 노리고 접근하겠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널 못 믿어서가 아니야.
기껏 구해온 목숨 죽이기 싫어서 하는 말이야.
 
텐트는 두꺼운 천막을 사용했는지 바깥의 흉흉한 겨울바람도 제법 훌륭하게 차단합니다.
 
가운데 놓인 이동식 난로에서는 훈훈한 김이 피어올라 퍽 따뜻합니다.
 
난로에 얹힌 주전자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끓어오릅니다.
 
걱정이 된다, 말한 메테오가 당신에게 담요를 덮어주네요.
 
HOPE:실력을 증명하고 싶다면 X시에 가서, 정식 연병장에서 해.
작전지는 스파이 훈련 따위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단호하게 뱉는 한편, 머그잔에 더운 물을 담아왔다. 컵 손잡이가 네 쪽으로 향하도록 테이블 위로 올려놓는다.)
 
그라하 티아:(이곳까지 오는 길이 춥기는 했으므로, 담요를 꽉 붙잡고 어깨를 덮었다. 그제야 덜덜 떨리던 몸이 조금씩 녹는다.) ...안 돼, 위험할 거야. 믿는다고 했잖아. 내가 너를 지키겠다고.
나도... 1년 전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총을 잡고, 크리쳐도 터뜨렸어.
금속형이나 생체형 크리쳐 같은 조무래기들 말고... 더 강한 녀석도 봤었는데. (난로 사이로 손을 빼서 머그잔을 쥐고 미소를 짓는다.)
 
HOPE:...그게 정말이면 군번을 말해 보라니까. (미소를 마주치자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탈영병이어도 상관없어. 고발도 안 해. 나도 널 믿고 싶단 말이야,
 
그는 완강한 태도로 고개를 젓습니다.
 
스파이 같아서 못 믿는게 아니다, 몇 번이나 덧붙여 강조를 하네요.
 
그래도 안심하세요.
 
어쨌거나 그의 죽음이 오늘은 아니잖아요?
 
그라하 티아:......윽. 정 그렇다면, 말해주긴 할 건데.......
미리 알리지만, 기록이 남지 않았을 거야.
뭐... 무엇보다 탈영병이 맞기도 해. 나의 군번은, 094589171.
뒤에 1이 두 개 들어가서 외우기 쉽지?
...다시 말해줄까?
 
HOPE:(멍한 눈빛으로 군번을 말하는 입술을 바라본다. 그래봤자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면 확인하는 의미도 없겠지만.)
 
그라하 티아:자, 다시, 다시. 까먹으면 안 되니까!
 
HOPE:됐거든, 확인도 못할 번호라면 들어도 소용 없어...
 
그라하 티아:...AOC라고 대문짝하게 프린팅 된 메모지,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거 펜이랑 안 가지고 다녀?
사인해준답시고 몇몇은 꼭 챙기더라. 누구처럼 바보같이.
 
HOPE:(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들고 있던 가방 앞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 던진다.)
사인해주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거든.
...아, 이것도... (용도가 명백해 보이는 매직펜을 꺼내 놓는다...)
 
그라하 티아:(날아오는 메모장을 가볍게 받아들고, 매직펜을 쥔 채 콧방귀를 뀐다. 과거의 메테오도 속이 다 보이네...)
(뚜껑을 뽁 열고 메모장 위에 번호를 끄적이기 시작한다.)
(094/ , 589/171 .)
 
당신이 메모장 위에 군번을 적어넣은 순간.
 
적어 넣은 숫자가 거짓말처럼 흐릿해집니다.
 
당신이 미래의 사실을 남기려 하는 순간, 펜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툭 빠지고...
 
귓가에 불길한 이명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마치 전할 수 있는 내용에 사슬이 감기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따끔거립니다.
 
진실을 전할 수 없는 것이 클리셰 SF 세계관의 현실입니다.
 
그라하 티아:
SAN Roll
기준치: 84/42/16
굴림: 85
판정결과: 실패
 
이성 2점 감소합니다.
 
비어버린 메모지를 바라보던 메테오의 눈빛이 흐릿해집니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군요.
 
과거를 살아가는 그와, 미래로 돌아가야 할 당신.
 
함께 가기를 원해도 불가능합니다.
 
민간인을 최전선에 데려가다니 말도 안 되잖아요.
 
천막을 나서며 그가 당신을 돌아봅니다.
 
HOPE:오래는 안 걸릴 거야. 우린 프로거든.
 
그리고 쉴 틈도 없이 이별입니다.
 
TRUTH:이봐, 가자고!
 
저 밖에서 메테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관객석에 남겨진 당신.
 
여전한 감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그라하 티아:(멍하게 그가 사라진 천막의 입구를 바라본다. 천이 바람에 좌우로 흔들리다 멈추고, 그 순간 떨리는 손으로 들었던 메모장을 한껏 구겼다. .....뭐야?)
(누가 장난을 치는 게 틀림없어. 메테오가 봤다던 그 외계인 짓 아니야? 사실은 꿈이었다, 허상이었다. 여기서 깨어나면 그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손을 들어 볼을 꼬집자 검지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흐른다.)
(추위 때문에, 혹은 울었기 때문에 다시 코를 들이키며 메모지를 내려둔다. 팔로 슥슥 눈가를 문지르자 새빨간 패딩에 흔적이 묻어난다.)
(...현실이야. 현실을 부정하면서 슬퍼하는 걸 메테오도 원하지 않을 거야. 그가 지켜낸 세계니까.)
(담요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내밀어 천막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잊고 있던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덮친다.)
 
그렇습니다. 슬퍼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요.
 
SF 세계관의 주연이란 어떤 시련에든 의연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각오를 다진 당신이 천막 밖으로 나서면...
 
탄창을 채우고, 무기와 군복의 상태를 점검한 AOC 요원들이 하나둘 헬기에 탑승하고 있습니다.
 
투두두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프로펠러가 돌아갑니다.
 
귀를 때리는 굉음이지만 익숙해서 안정감이 들 지경이네요.
 
마지막으로 헬기에 타던 메테오는 당신에게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웃는 얼굴입니다.
 
눈보라가 약해져서 천만다행이에요.
 
지구의 유일한 '희망'을 태운 헬기는 금세 하늘 위로 비상해서는 저 멀리 온점보다 작은 구멍이 됩니다.
 
...
 
헬기가 거센 바람을 몰고 사라지면, AOC 작전 본부에는 당신을 비롯해 5명 남짓의 정찰 담당만 남았습니다.
 
임시로 세운 본부는 여러 개의 텐트가 듬성듬성 배치된 형태입니다.
 
가장 안쪽의 텐트는 리더의 것인지 AOC의 마크가 커다랗게 찍혀 있습니다.
 
끄트머리에는 헬기와 자동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군요.
 
텐트 한쪽으로 정찰 담당 요원들이 보입니다.
 
최전선에서 배제된 정찰 담당 요원들은 대부분 신입으로, 당신을 크게 경계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그야 민간인인걸요. 전직 최강이긴 하지만요.
 
지나치게 당황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작전 본부를 돌아다니거나, 대화를 거는 것 정도는 묵인합니다.
 
본부를 뒤집어 엎는 것만 아니라면, 돌아다니거나 대화를 걸 수 있겠습니다.
 
그라하 티아:(얼굴... 괜찮았겠지. 분명 헬기에서 나를 봤는데. 메테오가 건넨 담요로 얼굴을 다시 닦아버리곤, 바닥에 널부러지도록 던져버린다. 바깥쪽으로 나서려는 순간... 변덕이 생겨 담요를 줍고 곱게 접어둔다.)
(조금씩 쭈뼛거리며 라미트의 뒤로 다가간다. 아, 아. 목소리엔 이상 없음.)
저기.......
... ...혹시 헬기 운전할 수 있나? 아, 아직인가.......
 
SOLACE:헬기......? 갑자기 무슨 소리니? 오면서 충격이 심했어?
헬기나 차량은 요원들에게도 중요한 이동 수단이야. 운전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함부로 건드리는 건 곤란해.
 
그라하 티아:뭣, 지, 진짜...!! (화색이 되어 꼬리를 움직인다. 기쁜 내색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한다. 좋아, 그럼 어떻게든 라미트를 회유해야 하는데......)
저기라고 불러서 미안. 코드명이 SOLACE라고 했지. 그보다 저쪽에 서 있는 네 명 말인데. 어떻게 생각해? 유능한 동료들이지?
 
SOLACE:(살짝 입술을 오므렸다가, 맑게 웃으며 끄덕였다.) 물론이지. 이곳에 유능하지 않은 동료는 없어. 당신을 구해온 HOPE와 임무에 나간 TRUTH를 포함해서 말이야.
 
그라하 티아:그럼 너 하나 빠진다고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SOLACE! 나를 위해 헬기를 운전해 줘!
 
...
 
그라하 티아:
설득
기준치: 70/35/14
굴림: 58
판정결과: 보통 성공
 
폭탄 같은 발언에도... SOLACE의 표정은 어두워집니다.
 
SOLACE:......으음, 메테오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어. 그렇지만 Z시의 탈환은 현재로서는 어려울지도 모르는 작전이야.
변종 생체형 크리쳐의 등장으로 다들 고전하고 있거든. 우선 생존자들은 모두 X시로 이동했으니 1차 전투 후 상황을 봐서 퇴각하게 될 수도 있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안심해.
그러니 그런 어두운 생각 말고... 텐트 안에서 조금 더 쉬도록 해. 다들 무사히 돌아올 거야!
 
그라하 티아:...큰 전투가 아니면 이쪽도 가도 되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감이 왔어, 여긴 승산이 없어. 텐트로 곱게 돌아가지는 않을 거지만... 이것도 기회인데 본부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할까.)
나야말로 걱정을 끼친 것 같네. 아무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라미트. 네 말대로 모두 무사히 귀환할 거야.
 
SOLACE:응? 잠깐, 당신이 내 이름을 어떻게......
 
SOLACE의 눈동자가 안개가 낀 것처럼 하얗게 번집니다.
 
조금 전의 메테오와 마찬가지군요. 그러나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본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라하 티아:(이쪽도... '망각'하는 모양이군. 그쪽이 더 바람직하긴 하겠지만, 앞으로의 메테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상념은 나중에 가지자. 고개를 세차게 흔든 뒤, 본부의 시설을 한눈에 담는다. 요원들이 지내는 텐트가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고... 안쪽에는 문양이 조금 다른 텐트가 있었지. 천막 위에 신뢰감 넘치는 로고도 제대로 박혀 있었고. 경험한 바로는 아마 그 장소가 중요 인물이 머무는 곳일 터!)
 
AOC 마크가 크게 새겨진 텐트 앞은 정찰 담당 한 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신뢰감이... 넘치던가요? 뭐, 그런 셈 칩시다.
 
그라하 티아:(정찰 중인 요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안쪽으로 걸어들어간다. 여러 텐트를 지나면서 본 헬기랑 자동차가 구식이라고 생각할 때 즈음, AOC 마크가 찍힌 텐트 앞에 도달한다.)
 
정찰대원:이 앞은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라하 티아:(정찰대원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어. 그쪽으로 들어가려는 건 아니야. 다만... 용건이 있어서.
 
정찰대원:......무슨 용건입니까?
 
그라하 티아:...이쪽 말인데, 배가 조금 많이 아프거든. 도와줘....
(어설프게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흉내를 낸다. 힐끔힐끔 대원을 바라본다.) 사... 사람 살려! AOC 본부 한복판에서 사람이 죽게 생겼어!
 
그라하 티아:
기준치: 60/30/12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대단한 연기력입니다...... 역시 최강은 다르군요.
 
정찰대원:예? 어, 어엇.....!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의무병을 불러오겠습니다!!
 
정찰 담당은 당황하며 자리를 비우고 사라집니다.
 
연기가 먹혀서 다행이네요. 단순히 그가 신입이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요.
 
그라하 티아:(사라지는 대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이렇게 자리를 쉽게 비워도 되는 거냐고... ...한 소리 들어도 내 탓은 아니야. 그대로 꼬리를 살랑이며 입구의 천을 걷어낸다.)
 
텐트 내부에 들어섭니다.
 
내부는 별다를 게 없습니다. 당신이 맡겨졌던 텐트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회의 시에 사용한 건지 화이트보드에는 지도와 몇 장의 보고서휘갈긴 메모가 남아있습니다.
 
그라하 티아:어라, 생각보다 별거 없나... 뒤져보면 알겠지.
(화이트보드에 고정된 지도를 살핀다. 아쉽다, 이것도 라미트가 헬기 운전을 해준다면 도움이 될 텐데.)
 
Z시의 지도입니다. 외곽에 AOC 작전 본부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광장, 병원, 백화점에 각각 타겟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1차 전투 예상 지역일까요?
 
그라하 티아:(낯익은 타겟 스티커를 보며 어깨를 으쓱인다. 이렇게 세 구역이 중요 순찰 구역인가 보군. 다음은, 몇 장의 보고서. 기억해 둘 만한 내용이 있나?)
 
생체형 크리쳐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5년 전 정보인 만큼 당신이 아는 것보다 낙후되었습니다.
 
생체형 크리쳐의 발생 원인이 인간의 시체를 섭취한 것이라 예상된다거나, A시 근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거나…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정보들을 곧이곧대로 믿던 때가 있었죠.
 
이젠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요.
 
그라하 티아:
자료조사
기준치: 80/40/16
굴림: 3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보고서의 내용 중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생존자의 진술을 대조해본 결과, Z시에 출현한 생체형 크리쳐 α는 한 번 본 상대의 외형을 복사할 수 있는 것으로 추측.〉
 
〈각별히 주의 요망.〉
 
어라, 익숙한가요?
 
그라하 티아:(여러 겹으로 쌓인 보고서를 뒤적거리던 중, 빠르게 문장을 훑던 끝에 눈동자가 멈칫한다. Z시에도 외형 복사가 가능한 변종 크리쳐가 있었던가. 처음 보는 개체도 아니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메테오... 괜찮겠지. 지금이라면 변종을 충분히 이성적으로 볼 수 있을 거야...
(보고서를 내려두고 가까운 곳에 놓인 휘갈긴 메모를 확인한다.)
 
몇 개의 단어가 보이지만, 필기체인 데다 워낙 휘갈긴 탓에 제대로 읽기 어렵습니다.
 
그라하 티아:
언어(모국어)
기준치: 80/40/16
굴림: 47
판정결과: 보통 성공
 
메테오의 대체 인력, T, S, E……. 아무래도 그의 실종으로 인한 부재를 채우기 위한 후보들의 이름이었던 모양입니다.
 
AOC 요원의 목숨이란 언제나 그런 식이었죠.
 
쓰고 나면 새 것으로 갈아끼우면 그만인 헌신짝.
 
이제는 그리 놀랍지도 않습니다.
 
그라하 티아:(이미 사망 판결을 내린 것도 아닌데, 구멍을 잘 채워줄 인재를 모색하고 있었나. 메테오의 빈자리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겠지. 또, 작전 보고서에 따르면 사람 수를 똑같이 맞춰야 했을 테고. 굳은 얼굴로 메모에서 시선을 떨어뜨린다.)
(정찰대원이 정말로 의무병을 데려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얼추 손길이 가지 않은 것처럼 물건을 정리해 두고선, 입구의 천을 들추고 나왔다.)
 
텐트를 빠져나오면, 다행히 정찰대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천막 너머로 늘어선 헬기와 차량이 보입니다.
 
구식이긴 해도 당신에게도 익숙한 모델입니다.
 
헬기와 자동차 운전쯤이야 AOC 훈련 튜토리얼 항목인걸요.
 
진작 때웠죠. 그리운 기분이 드네요.
 
그라하 티아:
관찰력
기준치: 80/40/16
굴림: 2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헬기와 자동차는 모두 시동이 걸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사시에 달려갈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유사시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바로 지금처럼요.
 
당신이 AOC 작전 본부를 얼추 돌아봤을 무렵.

 
지나가는 요원의 주머니에서부터 거친 기계음이 흘러나옵니다.
 
무전기의 신호입니다. 사람이 없는 텐트 사이로 잡음 섞인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런 알량한 정부의 방송이 아니라,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5월이라니, 봄 같은 건 기억나지 않아요.
 
메이데이, 그런 구조신호가 존재한단 사실조차, 어쩌면 발음조차 생소합니다.
 
그야 당연하죠. 당신과 메테오는 언제나 인류 최강이었는걸요.
 
바짝 마른 코끝에서 혈향이 느껴지고, 그곳으로 달려가야한다는 본능이 치밉니다.
 
안온한 본부 한복판에 안주했다간 파트너가 다양한 사인 중 하나로 죽어버리고 말 테니 욕구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상하다.
 
메테오는 분명히 살아돌아올 텐데.
 
그에게 죽음이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여야 하는데.
 
사방에 눈이 쌓여 질리도록 새하얗습니다.
 
이곳은 도시 외곽, 아득하게 휘몰아치는 흰 눈보라 너머로 저 멀리 도시의 노을이 지고 있습니다.
 
드문드문 땅거미가 잠식한 풍경은 어쩐지 위태롭고 불안합니다.
 
비명과 함께 무전이 끊깁니다.
 
고요하던 AOC 작전 본부는 금세 들썩거립니다.
 
문득 당신은, 자신의 숨이 굉장히 거칠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한가요?
 
그러니까, 그는 너무 어리고, 위태롭고, 다정하고, 그래서,
 
이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그리고,
 
아, 맞습니다…….
 
그라하 티아:메테오에게 가야 해.
 
라고,
 
어떤 사명감을 느꼈는지도(어쩌면 말해버리기까지 했는지도!) 몰라요.
 
부추기듯 두드리는 심장 고동 소리를, 당신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앞의 헬기로 달려듭니다.
 
아니, 달려들었을 겁니다. 분명 달려들지 않았나요?
 
당신의 두뇌는 변함없이 최강입니다.
 
기체의 작동 방식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조종간을 쥐고, 기어를 맞추고, 레버를 당기면,
 
프로펠러와 테일로터가 돌아가는 굉음과 함께……
 
AOC 요원들의 고함 소리가 메아리칩니다.
 
그 짧은 순간, 조종석에 앉은 당신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단 한 사람만을 태운 헬기는 상공으로 날아오릅니다.
 
목표 지점은 Z시의 광장.
 
파트너가 기다리고 있을 바로 그 도시.
 
창 아래로 펼쳐진 설원은 눈이 시리도록 희디흽니다.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의 안위가 불안합니다. 이렇게 잃을 수는 없습니다.
 
눈앞에서, 그것도 두 번씩이나요.
 
떠난 지 오래된 동네지만 지도의 구조는 이미 암기하고 있습니다.
 
능숙하게 광장을 향해 핸들을 당깁니다.
 
성탄절을 맞은 도시의 야경이 노랗고 푸른 조명으로 반짝입니다.
 
광장 근처 건물, 백화점 옥상에는 헬기 전용 주차장이 있습니다.
 
거대한 프로펠러가 멈추는 진동이 온몸을 울립니다.
 
헬기의 문이 열리고, 따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칩니다.
 
복잡한 머릿속이 한결 식는 것 같습니다.
 
저 아래 점처럼 보이는 사람 중……
 
그라하 티아:
관찰력
기준치: 80/40/16
굴림: 3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파트너를 단박에 찾아냅니다.
 
똑같은 AOC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주위에 무수히 쓰러진 가운데,
 
메테오는 동료 TRUTH와 함께 제법 잘 싸우고 있습니다.
 
맞은편에 선 생체형 크리쳐는 이리저리 형체를 바꾸며 몇 번이고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합니다.
 
그라하 티아:(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귓가를 찌르는 무전기 소리가 머릿속을 유영하듯 여전히 떠나가지를 않고, 성탄절을 축복하는 수많은 광색 사이로 메테오를 바라본다. 그가 조우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귀뜸을 해 주었던 생체형 크리쳐, 그들 중에서도 최상위급 개체인 α. 스무 살의 몸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녹슬지 않은 직감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를 도와야 해.)
(알록달록 조명이 감긴 옥상의 난간을 두 손으로 붙잡고, 탄피를 떨어뜨리는 그를 향해 소리친다. 설령 겨울바람에 목소리가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메테오......!!!
그쪽으로 금방 갈게, 기다려!
생각해봤는데, 최강의 인류에게도... 산타는 필요한 법인 것 같아!
(그대로 난간이 휘청이도록 손을 떨어뜨리고, 몸을 돌려 숨이 가쁘도록 달려간다. 헬기의 문은 닫지도 않고, 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을 찾아서.)
(뽀얀 김이 나오는 입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메테오, 메테오. 아무도 듣지 않을 이름을 속삭였다.)
 
당연하게도 당신의 외침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간, 그는 어째서인지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거짓말처럼 휘청거립니다.
 
유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일 겁니다.
 
더 늦기 전에 파트너에게 가야 해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다리가 뻗어나갑니다.
 
달리고, 달리고, 달립니다.
 
옥상을 벗어나 8층 가전제품, 7층 인테리어,
 
6층 스포츠웨어, 5층 유아동 의류,
 
4층 남성 의류, 3층 여성 의류,
 
2층 패션 잡화,
 
1층 화장품과 향수,
 
엘리베이터조차 작동하지 않아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미친 듯이 내달립니다.
 
쿵!!!
 
착지한 대리석 바닥에 길게 기스가 나고,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신발 자국이 남습니다.
 
모든 것이 문제투성이입니다.
 
엉망진창으로 구른 끝에 백화점의 문을 열면,
 
난장판이 된 광장이 펼쳐집니다.
 
불길한 피 냄새와 지독한 악취가 피어오르는 전투의 현장.
 
그곳에서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건……
 
가는 눈의 크리쳐:그륵, 그르륵…….
 
‘그어그어’하고 우는, 클리셰 SF 세계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리쳐의 눈동자.
 
짐승처럼 가느다란 동공은 어느 생명체를 합성한 흔적일까요?
 
그 교활하고 자아를 잃은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집니다.
 
문득 머릿속에 어떤 문장이 스칩니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면,
 
그라하 티아?:메테오! 살려줘!
 
또 한 명의 그라하 티아가 그곳에 있습니다.
 
아,
 
탄환 장전을 위해 잠시 시선을 뗐던 메테오는 무척 놀란 얼굴입니다.
 
HOPE:……네가 왜 여기 있어?
 
AOC의 규칙, 첫 번째.
 
그러나 자신을 구한, 자신이 구한 소년입니다.
 
메테오는 한순간 머뭇거렸고……
 
퍽!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그라하의 형태를 가지고 있던 크리쳐의 얼굴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길쭉한 팔을 휘두릅니다.
 
그 타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은 메테오의 배가 꿰뚫립니다.
 
...
 
...
 
아니, 배가 맞나?
 
어쩐지 조금 더, 위인 것 같은…….
 
크리쳐의 뒷발이 메테오를 내팽개치면, 텅 빈 동공을 가진 몸이 광장의 경계에 버려집니다.
 
상처 부위에선 끊임없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피가 샘솟습니다.
 
고작 몇 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당신은 얼어붙습니다.
 
지독하게 익숙한 꼴,
 
그리고 동시에,
 
그라하 티아:
지능
기준치: 90/45/18
굴림: 78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래요.
 
메테오는 낙오되어 설원을 헤매다 뒤늦게 작전 본부에 도착했죠.
 
텐트 안에서 있었을 회의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어요.
 
상급 크리쳐의 특수 능력을 몰랐을 겁니다.
 
‘진짜 파트너’와 ‘가짜 파트너’를 구분하는 법 따위, 지금의 그가 알 리도 없고요.
 
그러나 생각은 언제나 한 박자 늦습니다.
 
당신이 그에게 다가가면, 최강의 인류지만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청년이 색색, 밭은 숨을 몰아쉽니다.
 
가물거리는 시선, 붉게 물든 방탄조끼,
 
멈추지 않는 피는 바닥마저 같은 색깔로 적십니다.
 
잿빛의 도시에서 홀로 붉은 당신의 파트너.
 
낯설고도 익숙한 죽음이 엄습합니다.
 
그는 최강의 크리쳐가 아니에요. 이대로 죽으면 되살아나지 못할 겁니다.
 
전투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어요.
 
...
 
메테오는 흐물흐물 반쯤 녹은 입으로,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우물거립니다.
 
 
그러나 다리는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라하 티아:
SAN Roll
기준치: 82/41/16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이성 5점 감소합니다.
 
지끈, 머릿속에서 무언가 무너져내리는 감각입니다.
 
그라하 티아:
지능
기준치: 90/45/18
굴림: 74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간신히 미치지는 않았군요. 숨이 뜨겁게 터져나옵니다.
 
얼떨떨하게 서 있는 사이, 메테오는 가까스로 팔을 뻗어 당신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HOPE:각, 오하고 있었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도, 우리 일이야.
...컥, 헉, 그러니까, 어서,
 
그의 속눈썹 끝에는 눈송이가 매달려 있습니다.
 
분명 눈송이일 거예요. 그가 우는 것은 본 적이 없으니까요.
 
공교롭게도 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더는 말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죠.
 
그러게, 대뜸 몸부터 들이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라하 티아:......
...최강의 인류는,
허풍이 아니라고 했잖아.
나를 믿어준다고, 다시 웃어 보이겠다고. 내 말에 긍정하고, 알겠다고 했으면서!
이... 이번에도 그러는 거야? 아니야, 너는 여기서 죽을 인물이...... 아닌데.
 
...
 
너덜너덜한 머리는 축 늘어지며, 그의 손이 바닥 위로 엎어집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최강의 인류!
 
메테오의 심장이 박살난 순간!
 
긴 이명이 들리고,
 
째깍,
 
심장이 쿵쾅거리더니,
 
째깍,
 
HOPE:어서 가!!!
 
째깍,
 
단말마 같은 당부와 함께,
 
째깍,
 
눈앞이 핑 돌며……
 
딸깍.
 
불 끈 거 누구야?!

 
...
 
...
 
폐부에서부터 강한 압력이 치솟고, 이내 거센 기침 소리와 함께 어떤 덩어리가 목구멍을 열고 왈칵 쏟아집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은 눈을 뜹니다.
 
믿기지 않게도 울음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건 눈물이 아니라…… 시계입니다.
 
금속 재질로 은색을 띠고 있으며 내부에 든 것은 새파랗게 빛나는 점액질과 복잡다단한 태엽들.
 
크리쳐의 핵.
 
이야기의 시작에서 당신이 파괴했던 바로 그것.
 
기억하고 있나요?
 
5년 전의 그날,
 
메테오는 Z시 탈환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상급으로 각성한 생체형 크리쳐 α와 고전,
 
그럴싸하게 민간인을 흉내낸 접근 방식에 넘어가 늑골이 박살나고 심장의 절반을 잃는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5년 후에도 살아있습니다.
 
아차, 지금은 아니던가요?
 
뭐 어때요.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는걸요.
 
5년 후를 살다 온 당신이 그 증거겠지요.
 
최강의 크리쳐가 되지 못한, 단 한 번의 삶과 죽음만을 부여받은 메테오가…
 
어떻게 이 일을 겪고도 살아있던 걸까요?
 
살아남은 그는, 어째서 C.V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실험체가 됐을까요?
 
우연이라고 생각했나요?
 
설마요!
 
클리셰 SF 세계관에 단순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메테오가 C.V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실험체여야 했던 이유,
 
당신이 그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이 날의 그라하 티아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테오가 크리쳐의 핵을 주입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당신의 손에는 크리쳐의 핵이 들려 있습니다.
 
그의 색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톱니바퀴.
 
시간을 되돌려 산산이 조각난 크리쳐의 살점과 부품을 끌어모을 정도로 강력한 재생력을 지닌 핵!
 
사지가 멀쩡한 메테오의 신체를 수복하고 되살리는 것쯤 일도 아닐 겁니다.
 
자, 봐요.
 
당신의 발치에 엎드려진 목숨을.
 
죽어가고 있으나 아직 삶을 연명하고 있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빈 구멍은 딱 적당한 자리를 내놓고 있습니다.
 
핵을 꽂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메테오는 살아날 겁니다.
 
죽지 않는 신체를 얻어, 저편의 괴물을 물리치고 동료들을 구해내겠죠.
 
지난 크리스마스. 당신이 보았던 그 뒷모습처럼요.
 
모두 입을 모아 그를 칭송하길, 안전지대의 최전방을 수호하는 인류의 영웅,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강의 인류.
 
영웅의 소생은 C.V 실험의 완성을 이루는 열쇠가 되는 장면.
 
그리고 당신의 역할은 이번에도 단 하나,
 
세상과 인류를 위해 그를 구해내는 것.
 
그야말로 클라이막스입니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당신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창조할 유일한 연출가예요.
 
주연은 오직 메테오와 그라하 티아, 두 사람.
 
그라하 티아:구해줄게. 이건...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잖아. (의식을 잃은 동료에게 느린 속도로 거리를 좁힌다. 눈이 떨어진 바닥을 긁어 시계를 손 안에 그러쥐면, 손가락 사이로 새파란 광채가 살갗을 비추었다. 꺼질 듯하면서도 빛을 잃지 않는 형태가 그와 닮아 있어서, 피가 날 정도로 쥐고 있던 시계로부터 힘을 푼다. 푸른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나간 톱니바퀴가 가동하며 째깍, 소리를 울린 것 같기도 했다.)
(메테오, 이 시계는 너의 은총이자 사랑이 될 거야. 모두가 살아남는 내일을 위해 싸우게 될 매개체이기도 하고, 계속해서 맞서 싸우게 되는 지표가 될 것이며, 끝까지 발버둥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용기, 살아 있는 모두를 구할 수 있는 힘이라고 여길 수 있다고. 손을 내밀어 텅 빈 구멍에 시계를 끼워 넣는다. 배신하지 않는 탄환이 표적에 명중하듯 부드럽게.)
(메이데이. 이 땅에 봄을 가져올 자를 나는 잊지 않았어. 메리 크리스마스, 메테오.)
 
고민은 무의미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주말 특선의 클리셰 SF 영화라면, 지난 일 년 동안 수도 없이 보아온 당신인걸요.
 
그를 살릴 수 없다면 그 어떤 결말도 비극일 뿐입니다.
 
비록 그것이 클리셰 SF 영화 주인공의 마땅한 말로라고 하더라도요.
 
텅 빈 자리에 그를 위한 선물을 내려둡니다.
 
심장의 잔해를 가르고, 봄꽃이 피어오르듯이.
 
이 세계를 점령한 괴물의 중심이 그의 몸에 뿌리내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최강의 인류에게도 산타는 필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오직 한 사람,
 
이 잿빛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붉은... 당신만이.
 
그의 산타가 되어줄 수 있을 거예요.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익숙한 시계바늘 소리가 들립니다.
 
째깍,
 
째깍,
 
카운트다운처럼 순식간에 영점을 향해 달려가던 시간은,
 
잠깐.
 
무언가 이상한 의태어가 섞이지 않았나요?
 
깜빡?
 
HOPE:……그라하?
 
눈을 뜬 그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은 하나의 확신을 얻습니다.
 
메테오는…… 아니, ‘우리’의 존재는.
 
기계로 구성된 심장이 째깍째깍 돌아가기 시작하면, 메테오는 급속도로 회복합니다.
 
터졌던 내장이 복구되고, 찢어졌던 근육이 달라붙고, 구멍이 나 있던 피부는 아물기 시작합니다.
 
핵은 흔적조차 사라져, 온전히 그의 심장이 되고,
 
눈에 보이는 증거라곤 무엇 하나 남지 않았는데도……
 
 
 
카운트다운은 왜 끊이지 않죠?
 
삐익.
 
긴 이명이 들리고,
 
5,
 
심장이 쿵쾅거리더니,
 
4,
 
HOPE:잠깐, 왜 그래, 그라하!!!
 
3,
 
마지막 목소리가 멀어지고,
 
2,
 
눈앞이 핑 돌며……
 
1.
 
HOPE:가지 마!!!
 
두 사람의 시계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립니다.

 
 
 
정신을 차리면 다시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회색 도시입니다.
 
이파리를 떨구고, 빈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 위로 흰 눈이 소복하게 쌓였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잿빛의 크리스마스.
 
놀란 얼굴의 파트너가 당신을… 살펴야 하는데, 어라?
 
어쩐지 허전한 기분입니다.
 
파트너가 있어야 할 옆자리에는, 하얀 눈만이 끝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기나긴 꿈이라도 꾼 것만 같아요.
 
주위로 회백색 가루가 흩어져 내립니다.
 
무엇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귓가에 이명처럼 작별인사가 메아리칩니다.
 
문득 고개를 들면 도시 중앙의 시계탑이 보였습니다.
 
시침은 자정을 넘어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네요.
 
어째서 지금이었던 걸까요?
 
어째서 잊고 있었던 걸까요?
 
이토록 괴로운 기억이라면 떠올리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우연은 아닐 테지요.
 
안전지대의 최전방을 수호하는 인류의 영웅,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강의 인류.
 
당신이 살리고, 당신이 만들어 낸.
 
종내에는 당신을 구하고 나아가 인류를 구한…….
 
모두를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간신히 돌아온 원래의 궤도에,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검은 가지에서 흰 눈이 우르르 떨어집니다.
 
지긋지긋한 앙코르 요청입니다.
 
당신이 대답하건, 하지 않건 엔딩은 다가옵니다.
 
커튼보다 두껍고, 오래도록 거둬지지 않을 종류의 막이 내립니다.
 
가까운 곳에서 오래된 라디오의 잡음 섞인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당신은 일어서야 합니다.
 
이런 곳에 누워있을 시간이 없으니까요.
 
혼란에 빠진 도시를 지켜내고 이야기의 다음 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여기서 멈추어선 안 됩니다.
 
그가 남기고 간 세계.
 
영웅이 지키고자 했던 내일.
 
그 내일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이제는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크리쳐는 진화하고, 외계의 위험은 끊임없습니다.
 
인류는 서로를 이용하고, 해치고, 분열하면서도 결속을 향해 나아갑니다.
 
상황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괜찮습니다.
 
‘내일’을 믿고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어요.
 
우리는 존재 자체로…
 

 
 
큼, 큼.
 
그렇게 뻔할 리가 없잖아요.
 
시간은 정방향으로 흐르고 사건은 순리대로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선택으로 메테오는 핵을 이식받아 부활,
 
5년 전의 사건에서 몇 번이고 죽고 되살아나기를 반복하며 첫 생체형 크리쳐 α를 물리쳤습니다.
 
당신은 원래의 시간선으로 복귀 후… 피곤에 지쳐 기절했군요.
 
다시 깨어났을 때 당신은 이미 5년 전의 그라하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곳의 메테오는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언젠가는 그라하가 기억해주길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만,
 
동료들의 증언과 CCTV 영상, 신체검사의 수치 이상으로 그는 첫 번째 C.V 프로젝트의 대상자로 낙점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게 핵을 품은 몸이었으니까요.
 
그 이후 모든 기억을 되찾은 뒤에도, 그는 어째서인지 당신에게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죠.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에게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혹은 당신이 기억해주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요?
 
...
 
그것도 아니라면,
 
이상할 정도로 친근하고, 다정하고, 필사적이었던 그날의 파트너가…
 
'오늘'을 겪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요.
 
어느 쪽이든...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크리쳐는 진화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영웅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를 구하러 갈까요?
 
아니면 이대로 영영 도망칠까요?
 
엔딩 이후의 이야기는 마음대로 적어야……
 
 
 
아,
 
그럴 필요는 없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마음을 다잡으세요.
 
자신을 놓지 마세요.
 
한 번 더,
 
어쩌면 마지막으로,
 
이 빈약한 세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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